권력 안정화 위해 3대째 숙청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세습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숙청도 세습하고 있다. 북한은 체제 불안 요소를 제거해 1인 독재와 후계 구도를 굳건히 하는 통치 수단으로 숙청을 적극 활용해왔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 처형도 서슴지 않았다.
우선 ‘항일 빨치산파’로 분류되는 김일성은 6·25전쟁 기간인 1950년대 초반 중국 지도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연안파(중국 혁명 참가파)의 지도자 무정을 제거하고, 소련의 대리인 구실을 하던 소련파 허가이를 권력의 핵심에서 쫓아냈다. 이때 연안파와 소련파가 1차로 약화됐다.
또 김일성의 ‘피의 숙청’은 해방 전후 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의 1인자이자 북한 내 2인자였던 박헌영을 상대로도 이어졌다. 김일성은 1953~55년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 인사들을 반당·종파분자·정부전복음모 등 혐의로 처형했다. 6·25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 일파에게 뒤집어씌워 전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 것이다. 당시 소련과 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박헌영의 처형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김일성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권력 투쟁 사건은 1956년 ‘8월의 종파 사건’이다. 당시 김일성은 자신의 1인 지배에 도전한 연안파와 소련파를 “당의 영도적 역할을 부정하고 종파활동을 했다”며 완전히 숙청했다. 이어 1967년에는 자신과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빨치산 세력 가운데 일부인 ‘갑산파’를 숙청하고, 1969년엔 군부의 일부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1인 지배 체제를 완성했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1964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을 외국으로 쫓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이른바 ‘곁가지’들을 쳐냈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북한 사회의 동요를 막고, 체제 안정을 위해 사상을 검열하는 ‘심화조’를 결성해 고위 간부와 그들의 가족을 솎아내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서관히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는 북한 식량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김정은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례에 따라 자신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은 아버지의 측근이라도 권력의 핵심에서 주저없이 밀어냈다. 이른바 ‘운구차 호위 7인방’ 가운데 리영호 조선인민군 총참모장과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등이 그렇게 사라졌다. 반당 반혁명 종파 행위 혐의로 제거된 장성택은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부자 체제’에서 연이어 숙청을 당했다. 장성택은 김정일 체제이던 2003년 7월 북한 매체에서 측근인 최룡해 현 총정치국장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2000년대 후반 다시 복권되며 김정은 후계 체제의 후견인 노릇을 했지만, 결국 조카에게 제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관련영상] [한겨레 캐스트#210] '장성택 숙청', 북한은 어디로 가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