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김영삼 임기말
청와대의 ‘이인제 지원설’ 번져
신한국당 이회창 발끈
김영삼 때리기 퍼포먼스 등
정권과 선긋기 나섰지만
IMF 터지며 야당 김대중 당선 1997년 11월6일, 경북 포항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결의대회. 경북 구미갑 지구 당 소속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국민’이라고 쓰여진 마스코트가 김영삼 대통령을 상징하는 ‘03(영삼) 마스코트’를 막대풍선으로 마구 내리치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정권과 선긋기에 나섰음을 상징하는 퍼포먼스였다. 김 대통령은 다음날 곧장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했다. 1997년 대선, 김영삼 대통령과 집권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결별’을 보여주는 결정적 한 장면이다. ‘3김 시대 청산’과 ‘정권교체’라는 구호가 내걸렸던 1997년 대선, 김영삼 대통령은 막판까지 선거판을 흔드는 ‘숨은 손’이었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파문에 이어 이듬해 한보 게이트와 차남 김현철씨의 구속 사태 등으로 이미 레임덕 상태였지만, 김 대통령은 강력한 ‘보스 정치’를 기반으로, 여전히 선거판에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선을 꼭 3개월 앞둔 9월18일, 신문들도 ‘김심’에 주목했다.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줄곧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김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불렸던 이인제 후보가 추석연휴 하루 전날(1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의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해 탈당한 ‘원죄’가 있음에도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었다. 9월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 때까지만 해도 김 대통령은 “이 총재를 중심으로 재창출을 하자”며 이회창 후보 쪽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0월7일, 반전의 계기가 생긴다. 김 대통령의 측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디제이(DJ) 670억 비자금 관리설’을 폭로한 것이다. “김 후보가 처조카인 이형택씨를 시켜 365개의 가·차명 및 도명 계좌를 통해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국민회의 쪽에선 당장 “김 대통령의 1992년 대선 자금, 이회창 총재의 경선 자금까지 함께 조사하자”며 맞불을 놓았다. 비자금 폭로로 김 후보가 불리해지기는커녕 후보자간 공방으로 번져갔다. 양쪽의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인제 후보가 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선 비자금설 폭로가 ‘청와대의 작품’이란 얘기가 돌았다. 디제이의 집권을 막고, 이회창 후보 낙마 뒤 이인제 후보 중심으로 정치판을 완전히 새로 짠다는 김 대통령의 구상이 깔린 폭로라는 것이다. 때마침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 창당(10일) 작업도 착착 진행됐다. 이회창 후보가 “김 대통령의 대선 자금 자료도 나온다면 밝혀야 한다”고 운을 뗀 건 14일이다. 비자금 공세가 ‘야당을 표적으로 삼는 정치공작’이라는 비난을 누그러뜨리고 3김 정치와는 다른 새 정치를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역효과만 났다. 청와대는 “차별화는 자가당착”이라고 즉각 반발했고, 신한국당 안에서까지 후보 교체론이 흘러나왔다. 이어 김태정 검찰총장은 21일 “국가 대혼란이 우려된다”며 대선 전 비자금 수사가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회창 후보는 검찰의 수사 중단이 청와대와 검찰의 교감 속에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22일 급기야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 대통령은 “내가 만든 당”인데 누가 날더러 나가라는 것이냐며 할당을 거부했다. 한발 더 나아가 25일 김대중 후보와의 청와대 단독회담을 통해 비자금 폭로 개입설을 부인하는 한편, 대선의 중립적 관리를 약속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7일 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디제이피(DJP) 연합’ 협상이 타결됐다. 또 30일에는 이인제 후보와도 회동했다. 이회창 후보는 청와대의 신당 지원설을 주장하며 “국민신당=김영삼 신당”이라고 공격했다. 한편으론, 조순 민주당 후보와 11월7일, 당 대 당 통합 및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지지율 상승의 기회를 맞았다. ‘03마스코트 사건’은 이 과정에 벌어졌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12월1일 밤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이회창 후보가 강조해온 ‘3김 청산’ 이슈는 실종되고, 현 정부의 경제실정이 선거 전면에 부각됐다. 이회창 후보는 물론 이인제 후보까지 나서 김영삼 정권의 실책을 비판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12월18일, 민심은 ‘준비된 경제대통령’을 내세웠던 야당 후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줬다. 40.3%, 사상 첫 여야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2002년 김대중 임기말 김대중 집권말 아들 비리로
한나라당과 여론서 뭇매
민주당 내부에서도 ‘탈디제이론’
노무현은 정권 계승 선언하고
정몽준과 단일화 등 힘입어 승리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만 공격한다. 이 후보의 상대는 나 노무현이다.” 2002년 대선을 21일 앞둔 11월29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민주당) 후보가 서울 신도림역 유세에서 한 말이다. 2002년 대선 내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부패 정부 심판론’을 제기하며, 선거 막판까지 노 후보보다는 김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김 대통령의 아들들이 연루된 ‘3대 게이트’ 등 정권 말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에 참패를 안겨준 데 이어, 여당 후보라는 이유로 노 후보(지지율 10%대)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가뜩이나 월드컵 4강 진출의 열기로 인기가 급상승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국민통합21 후보)까지 9월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해 개혁 성향의 표가 분산된 상황. 여당 안에서도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며 노-정 두 후보의 단일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대선을 석달 앞둔 9월19일 치러진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발족식 풍경은 이런 침울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후보 단일화나 당 대 당 통합 등 후보의 지위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결정도 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노 후보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 내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당내 잡음은 선거 막판까지 계속됐다. 10월4일, 김영배·김원길·박상규 의원 등 비노·반노파 의원 34명이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었고, 같은 달 18일 김민석 전 의원이 정 후보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하는 등 당원들의 이탈도 가속됐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돌풍을 ‘청와대 음모론’으로 몰아붙이며 막판에 후보직을 사퇴했던 이인제 의원은 12월1일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 총재직을 맡았다. 수많은 의원들이 후보들의 지지율 곡선 변화에 따라 국민통합21로, 한나라당으로 바쁘게 이합집산하던 시기였다. 노 후보의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고, 민주당 내에선 ‘탈 디제이(DJ)론’이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신기남 정치개혁본부장 등이 11월1일 선대위 본부장단 회의에서 “탈 디제이만이 유일한 승부수”라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노 후보는 2일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면 되는 것이지 사람을 모욕해 정서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은 신의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앞서 10월30일, 대북 송금설과 관련해 “그 돈이 비합리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국민이 믿고 있다. 고발된 사건인 만큼 검찰이 계좌 추적을 할 명분도 있는데 왜 하지 않느냐”고 비판한 것처럼,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현 정부의 잘못된 점은 고쳐나간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내부의 분란을 즐기며 ‘김대중 대 이회창’의 대립 구도 만들기에 집중했다. 9월27일엔 김대중 정부가 6·15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4억달러를 지원했다는 ‘대북 송금설’을, 10월9일엔 ‘노벨상 로비계획 문건’을 폭로하는 등 김 대통령의 부정부패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11월16일, 노·정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에 대해서도 “청와대가 부패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연출하고 있는 대국민 사기극”(서청원 대표)이라고 몰아갔다. “단일화라는 야합을 통해 (노 후보 대신 정 후보로) 민주당 후보를 교체하려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같은 달 24일, 노 후보는 단일 후보가 됐다. 이에 한나라당은 28일 ‘청와대 실세들이 국민경선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담긴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내용이라며 문건을 공개했다. ‘도청은 공작정치의 상징’이고, ‘공작정치의 주역은 김대중 정권’이며, ‘단일 후보로 선출된 노 후보는 현 정권의 계승자’라는 삼단논법으로 선거판을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도청 파문은 “완전히 조작된 괴문서”라는 국정원의 반박과 후보 단일화 이후 거세진 ‘노풍’의 위력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선 하루 전(12월18일), “노 후보가 서울 명동 합동유세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정 후보가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호소하는 노 후보는 47.8%의 득표율로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의 정부’를 계승한 ‘참여정부’의 시작이었다.
2007년 노무현 임기말 열린우리당-민주신당 분열로
노무현과 정동영 불편한 관계
이명박 상승세에 맞서
다시 손잡고 지원사격 불구
범여권지지 표 분산되며 좌절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번이나 지낸 사람이 탈당해 신당을 만드는 과정에 앞장선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인간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10월16일) “(정 후보에게) 열린우리당의 가치라든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라든가, 스스로 창당한 당을 깨야 할 만한 그런 이유가 있는지 들어봐야겠다. 또 내가 사실상 당에서 쫓겨났는데 그렇게 할 만한 심각한 하자가 나에게 뭐가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다.”(노무현 대통령, 10월20일) 치솟는 집값과 사교육비 증가, 비정규직 급증, 양극화 극대…. 보수 세력이 제기한 ‘정권 심판론’이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2007년 대선 속 현직 대통령과 여당 후보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다. 노 정권에 대한 심판론은 ‘비비케이(BBK) 주가조작 사건’ 등 후보의 도덕적 결함마저 덮어버렸다.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공세가 먹혀들어간 것이다. 대선을 3개월 앞둔 9월19일치 신문은 이를 입증한다. 이명박 후보가 56.7%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1면 왼쪽 하단에 들어 있다. 한편엔, 노 대통령 스스로 ‘측근’이라고 불렀던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에 대해 검찰이 구속 영장 청구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실려 있다.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 3파전으로 본격적인 경선 체제에 돌입한 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 앞에 전달된 또 하나의 ‘악재’였다. 이명박 후보가 일찌감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것과 달리 정 후보는 10월14일에야 통합신당의 후보로 확정됐다. 조직·동원 선거 논란 속에서 경선 중단이란 파행까지 겪은 뒤였다. 경선 효과는 미미했고, 가뜩이나 범여권에선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 이인제 민주당 후보까지 출마를 벼르고 있었다. 정 후보로서는 당내 친노세력을 끌어안고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나서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은 셈이었다. “정 후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껴안고 가기 바란다”는 노 대통령의 지적에 정 후보가 16일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답변한 것은 관계 복원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잃어버린 10년’ 프레임으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성과를 허물려는 이명박 후보에 맞서기 위해선 청와대 쪽도 정 후보가 필요했다. ‘노무현-문국현 연대설’이 불거진 데 대해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25일 “대통령은 문국현 후보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떤 입장을 가질 만큼 검정을 거친 분도 아니다”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반박했다. 30일엔 노 대통령이 나서 “노무현 시대 5년을 지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사라지고 부패해도 좋다는 사회로 되돌아간다면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이라며 “국민이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11월1일 국회 운영위 국감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솔직히 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의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 이외에 지지할 생각이 없다는 노 대통령의 뜻과 같은 취지냐”는 질문에도 “그렇다.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11월13일 “범여권에서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대통령 선거에 올인해야 한다”며 “지금은 가뜩이나 지지율이 낮은데 거기(당 통합)에 몰두하면 안 된다. 정당 단일화가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문국현씨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연합으로 해서 대통령 당선시키고, 설사 안 되더라도 최선의 투쟁을 해서 국민적 인정을 받으면 나중에 통합해도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비케이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과 국가관을 문제 삼으며 11월7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야권의 표가 분산됐지만, 범여권도 끝내 힘을 합치지 못했다. 재야 원로들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날 통합신당과 창조한국당의 후보 단일화는 사실상 결렬됐다. 12월11일, 이인제 후보도 대선 완주 뜻을 밝혔다. 대선을 이틀 앞둔 16일, 이명박 후보가 “내가 비비케이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밝히는 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됐지만 반전은 없었다. 유권자들은 도덕성보다는 추진력에 더 후한 점수를 줬던 이명박 후보에게 48.7%라는 지지율로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다. 10년 만에 또다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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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이회창 발끈
김영삼 때리기 퍼포먼스 등
정권과 선긋기 나섰지만
IMF 터지며 야당 김대중 당선 1997년 11월6일, 경북 포항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결의대회. 경북 구미갑 지구 당 소속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국민’이라고 쓰여진 마스코트가 김영삼 대통령을 상징하는 ‘03(영삼) 마스코트’를 막대풍선으로 마구 내리치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정권과 선긋기에 나섰음을 상징하는 퍼포먼스였다. 김 대통령은 다음날 곧장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했다. 1997년 대선, 김영삼 대통령과 집권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결별’을 보여주는 결정적 한 장면이다. ‘3김 시대 청산’과 ‘정권교체’라는 구호가 내걸렸던 1997년 대선, 김영삼 대통령은 막판까지 선거판을 흔드는 ‘숨은 손’이었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파문에 이어 이듬해 한보 게이트와 차남 김현철씨의 구속 사태 등으로 이미 레임덕 상태였지만, 김 대통령은 강력한 ‘보스 정치’를 기반으로, 여전히 선거판에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선을 꼭 3개월 앞둔 9월18일, 신문들도 ‘김심’에 주목했다.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줄곧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김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불렸던 이인제 후보가 추석연휴 하루 전날(1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의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해 탈당한 ‘원죄’가 있음에도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었다. 9월30일, 신한국당 전당대회 때까지만 해도 김 대통령은 “이 총재를 중심으로 재창출을 하자”며 이회창 후보 쪽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0월7일, 반전의 계기가 생긴다. 김 대통령의 측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디제이(DJ) 670억 비자금 관리설’을 폭로한 것이다. “김 후보가 처조카인 이형택씨를 시켜 365개의 가·차명 및 도명 계좌를 통해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국민회의 쪽에선 당장 “김 대통령의 1992년 대선 자금, 이회창 총재의 경선 자금까지 함께 조사하자”며 맞불을 놓았다. 비자금 폭로로 김 후보가 불리해지기는커녕 후보자간 공방으로 번져갔다. 양쪽의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인제 후보가 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선 비자금설 폭로가 ‘청와대의 작품’이란 얘기가 돌았다. 디제이의 집권을 막고, 이회창 후보 낙마 뒤 이인제 후보 중심으로 정치판을 완전히 새로 짠다는 김 대통령의 구상이 깔린 폭로라는 것이다. 때마침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 창당(10일) 작업도 착착 진행됐다. 이회창 후보가 “김 대통령의 대선 자금 자료도 나온다면 밝혀야 한다”고 운을 뗀 건 14일이다. 비자금 공세가 ‘야당을 표적으로 삼는 정치공작’이라는 비난을 누그러뜨리고 3김 정치와는 다른 새 정치를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역효과만 났다. 청와대는 “차별화는 자가당착”이라고 즉각 반발했고, 신한국당 안에서까지 후보 교체론이 흘러나왔다. 이어 김태정 검찰총장은 21일 “국가 대혼란이 우려된다”며 대선 전 비자금 수사가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회창 후보는 검찰의 수사 중단이 청와대와 검찰의 교감 속에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22일 급기야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 대통령은 “내가 만든 당”인데 누가 날더러 나가라는 것이냐며 할당을 거부했다. 한발 더 나아가 25일 김대중 후보와의 청와대 단독회담을 통해 비자금 폭로 개입설을 부인하는 한편, 대선의 중립적 관리를 약속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7일 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디제이피(DJP) 연합’ 협상이 타결됐다. 또 30일에는 이인제 후보와도 회동했다. 이회창 후보는 청와대의 신당 지원설을 주장하며 “국민신당=김영삼 신당”이라고 공격했다. 한편으론, 조순 민주당 후보와 11월7일, 당 대 당 통합 및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지지율 상승의 기회를 맞았다. ‘03마스코트 사건’은 이 과정에 벌어졌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12월1일 밤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이회창 후보가 강조해온 ‘3김 청산’ 이슈는 실종되고, 현 정부의 경제실정이 선거 전면에 부각됐다. 이회창 후보는 물론 이인제 후보까지 나서 김영삼 정권의 실책을 비판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12월18일, 민심은 ‘준비된 경제대통령’을 내세웠던 야당 후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줬다. 40.3%, 사상 첫 여야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2002년 김대중 임기말 김대중 집권말 아들 비리로
한나라당과 여론서 뭇매
민주당 내부에서도 ‘탈디제이론’
노무현은 정권 계승 선언하고
정몽준과 단일화 등 힘입어 승리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만 공격한다. 이 후보의 상대는 나 노무현이다.” 2002년 대선을 21일 앞둔 11월29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민주당) 후보가 서울 신도림역 유세에서 한 말이다. 2002년 대선 내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부패 정부 심판론’을 제기하며, 선거 막판까지 노 후보보다는 김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김 대통령의 아들들이 연루된 ‘3대 게이트’ 등 정권 말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에 참패를 안겨준 데 이어, 여당 후보라는 이유로 노 후보(지지율 10%대)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가뜩이나 월드컵 4강 진출의 열기로 인기가 급상승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국민통합21 후보)까지 9월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해 개혁 성향의 표가 분산된 상황. 여당 안에서도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며 노-정 두 후보의 단일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대선을 석달 앞둔 9월19일 치러진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발족식 풍경은 이런 침울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후보 단일화나 당 대 당 통합 등 후보의 지위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결정도 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노 후보의 이날 발언은 민주당 내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당내 잡음은 선거 막판까지 계속됐다. 10월4일, 김영배·김원길·박상규 의원 등 비노·반노파 의원 34명이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었고, 같은 달 18일 김민석 전 의원이 정 후보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하는 등 당원들의 이탈도 가속됐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돌풍을 ‘청와대 음모론’으로 몰아붙이며 막판에 후보직을 사퇴했던 이인제 의원은 12월1일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 총재직을 맡았다. 수많은 의원들이 후보들의 지지율 곡선 변화에 따라 국민통합21로, 한나라당으로 바쁘게 이합집산하던 시기였다. 노 후보의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고, 민주당 내에선 ‘탈 디제이(DJ)론’이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신기남 정치개혁본부장 등이 11월1일 선대위 본부장단 회의에서 “탈 디제이만이 유일한 승부수”라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노 후보는 2일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면 되는 것이지 사람을 모욕해 정서적으로 차별화하는 것은 신의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앞서 10월30일, 대북 송금설과 관련해 “그 돈이 비합리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국민이 믿고 있다. 고발된 사건인 만큼 검찰이 계좌 추적을 할 명분도 있는데 왜 하지 않느냐”고 비판한 것처럼,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현 정부의 잘못된 점은 고쳐나간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내부의 분란을 즐기며 ‘김대중 대 이회창’의 대립 구도 만들기에 집중했다. 9월27일엔 김대중 정부가 6·15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4억달러를 지원했다는 ‘대북 송금설’을, 10월9일엔 ‘노벨상 로비계획 문건’을 폭로하는 등 김 대통령의 부정부패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11월16일, 노·정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에 대해서도 “청와대가 부패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연출하고 있는 대국민 사기극”(서청원 대표)이라고 몰아갔다. “단일화라는 야합을 통해 (노 후보 대신 정 후보로) 민주당 후보를 교체하려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같은 달 24일, 노 후보는 단일 후보가 됐다. 이에 한나라당은 28일 ‘청와대 실세들이 국민경선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담긴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내용이라며 문건을 공개했다. ‘도청은 공작정치의 상징’이고, ‘공작정치의 주역은 김대중 정권’이며, ‘단일 후보로 선출된 노 후보는 현 정권의 계승자’라는 삼단논법으로 선거판을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도청 파문은 “완전히 조작된 괴문서”라는 국정원의 반박과 후보 단일화 이후 거세진 ‘노풍’의 위력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선 하루 전(12월18일), “노 후보가 서울 명동 합동유세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정 후보가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호소하는 노 후보는 47.8%의 득표율로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의 정부’를 계승한 ‘참여정부’의 시작이었다.
2007년 노무현 임기말 열린우리당-민주신당 분열로
노무현과 정동영 불편한 관계
이명박 상승세에 맞서
다시 손잡고 지원사격 불구
범여권지지 표 분산되며 좌절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번이나 지낸 사람이 탈당해 신당을 만드는 과정에 앞장선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인간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10월16일) “(정 후보에게) 열린우리당의 가치라든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라든가, 스스로 창당한 당을 깨야 할 만한 그런 이유가 있는지 들어봐야겠다. 또 내가 사실상 당에서 쫓겨났는데 그렇게 할 만한 심각한 하자가 나에게 뭐가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다.”(노무현 대통령, 10월20일) 치솟는 집값과 사교육비 증가, 비정규직 급증, 양극화 극대…. 보수 세력이 제기한 ‘정권 심판론’이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2007년 대선 속 현직 대통령과 여당 후보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다. 노 정권에 대한 심판론은 ‘비비케이(BBK) 주가조작 사건’ 등 후보의 도덕적 결함마저 덮어버렸다.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공세가 먹혀들어간 것이다. 대선을 3개월 앞둔 9월19일치 신문은 이를 입증한다. 이명박 후보가 56.7%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1면 왼쪽 하단에 들어 있다. 한편엔, 노 대통령 스스로 ‘측근’이라고 불렀던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에 대해 검찰이 구속 영장 청구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실려 있다.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 3파전으로 본격적인 경선 체제에 돌입한 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 앞에 전달된 또 하나의 ‘악재’였다. 이명박 후보가 일찌감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것과 달리 정 후보는 10월14일에야 통합신당의 후보로 확정됐다. 조직·동원 선거 논란 속에서 경선 중단이란 파행까지 겪은 뒤였다. 경선 효과는 미미했고, 가뜩이나 범여권에선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 이인제 민주당 후보까지 출마를 벼르고 있었다. 정 후보로서는 당내 친노세력을 끌어안고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나서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은 셈이었다. “정 후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껴안고 가기 바란다”는 노 대통령의 지적에 정 후보가 16일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답변한 것은 관계 복원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잃어버린 10년’ 프레임으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성과를 허물려는 이명박 후보에 맞서기 위해선 청와대 쪽도 정 후보가 필요했다. ‘노무현-문국현 연대설’이 불거진 데 대해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25일 “대통령은 문국현 후보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떤 입장을 가질 만큼 검정을 거친 분도 아니다”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반박했다. 30일엔 노 대통령이 나서 “노무현 시대 5년을 지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사라지고 부패해도 좋다는 사회로 되돌아간다면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이라며 “국민이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11월1일 국회 운영위 국감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솔직히 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의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 이외에 지지할 생각이 없다는 노 대통령의 뜻과 같은 취지냐”는 질문에도 “그렇다.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11월13일 “범여권에서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대통령 선거에 올인해야 한다”며 “지금은 가뜩이나 지지율이 낮은데 거기(당 통합)에 몰두하면 안 된다. 정당 단일화가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문국현씨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 연합으로 해서 대통령 당선시키고, 설사 안 되더라도 최선의 투쟁을 해서 국민적 인정을 받으면 나중에 통합해도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비케이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과 국가관을 문제 삼으며 11월7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야권의 표가 분산됐지만, 범여권도 끝내 힘을 합치지 못했다. 재야 원로들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날 통합신당과 창조한국당의 후보 단일화는 사실상 결렬됐다. 12월11일, 이인제 후보도 대선 완주 뜻을 밝혔다. 대선을 이틀 앞둔 16일, 이명박 후보가 “내가 비비케이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밝히는 내용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됐지만 반전은 없었다. 유권자들은 도덕성보다는 추진력에 더 후한 점수를 줬던 이명박 후보에게 48.7%라는 지지율로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다. 10년 만에 또다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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