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할까, 분명한가, 내 생각인가….” 지난달 2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428호 자신의 방에서 만난 박선숙 전 의원은 단어 하나도 의미를 곱씹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신중한 정치인’ 박선숙 전 의원
처음부터 디제이 그분이 어렵지 않았어요
‘신중한 정치인’ 박선숙 전 의원
처음부터 디제이 그분이 어렵지 않았어요
박선숙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 국회를 찾은 날, 의원회관은 떠나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삿짐으로 시장바닥처럼 어수선했습니다. 지난 3월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한 박 의원은 당연히 떠나는 쪽이었지만, 표정은 밝았습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의 보좌관은 인터뷰팀의 녹음기와 별도로 자신의 녹음기를 살짝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의원도, 동석한 보좌관도 조용하고 신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뱉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실없는 질문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동안이라 저보다 어린 줄 알았습니다.
“철이 없는 얼굴이죠.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과 달리, 저처럼 오밀조밀한 얼굴형은 나이를 안 먹어요.”
-가수 이선희씨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죠?
“제 얼굴 안에는 이선희 말고도 여러 사람이 더 있어요. 성시경도 있고, 한석규도 있고.(웃음)”
-‘전직’ 국회의원처럼 처량한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 마음의 준비는 되셨나요?
“저는 이미 공직을 두 번이나 그만둬봤죠. 청와대에서 나왔을 때, 환경부 차관을 그만뒀을 때. 공직에 있는 동안 주어지는 여건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대부분 차와 수행비서 없는 불편을 얘기하시는데 저는 주말마다 버스, 택시를 타거나 직접 운전을 했기 때문에 괜찮을 거예요.”
-퇴임하면 뭘 먹고 사시죠?
“없이 사는 데 워낙 익숙해요. 생활비도 많이 안 들어요. 12월까지는 있는 걸로 버티고, 내년에는 학교 강의를 하려고 생각중이에요.”
-12월까지는 완전히 쉬실 건가요?
“몇 달 쉬고. 대선이 있으니까 마당이라도 쓸어야죠.”
다섯살 반에 초등학교 입학, 어머니의 편애
-승리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셨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쉽지는 않나요?
“저 속 편하려고 불출마했어요. 마음이 불편한 선택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반드시 병이 나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못 하는 게 좀 아쉽기는 하죠. 지난 몇 년 동안 유권자들은 정말 주먹을 꽉 쥐고 정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유권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는 걸 보면서 저라도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마중물 정도 돼서 저보다 비중 있는 분들이 불출마 선언을 더 해주기를 바랐는데…”
-동료들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야권협상의 대표가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맞지 않다고도 하셨죠.
“사실 어려운 선거였어요. ‘누구든지 나가면 당선되는데, 그게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선거를 망칠 거라고 예상했어요. 우리 내부에도 지역마다 후보가 5~10명씩 있었죠. 그런 사람들에게 경쟁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포기하게 만들었지요. 단일화 협상 때문에요. 더구나 저는 또 남들을 주저앉히면서 전략공천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국회의원이 내게 맞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퍼블릭 서비스, 공적인 역할을 내가 언제까지 하는 게 맞는가, 늘 질문하며 살아요. 일단 대선 때까지는 할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고요. 대선이 많은 걸 바꿀 거예요.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주어진 기회를 (총선으로) 한번 놓쳤어요. 마찬가지 기회가 대선 때 한번 더 와요. 그걸 놓쳐서 국민을 무시하는 낡은 세력의 권력을 연장시켜 주면, 죄를 짓는 것이지요. 지금 정치에 몸담고 있는 (야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정리를 해야 할 거예요. 지금은 일단 유예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 선거의 패인은 뭐죠?
“저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뭐든지 견디자며 사생결단으로 똘똘 뭉쳤어요. 친노를 공격하는 전략적 포인트도 잘 잡았어요. 에프티에이, 강정 문제에서 사실 우리 쪽이 말을 바꿨잖아요. 무책임한 거죠. 그 손실은 총선 넘어 대선까지 가요. 정치가 근본주의적인 것에 경도되면 안 돼요. 센 게 멋있어 보이지만 국민 다수보다 반 발짝만 앞서 가야 해요. 지금 시점에서 정확히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권이 목표인가, 아니면 가치를 지키는 게 목표인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집권해야 한다면 지금의 단계적 목표, 현실적 목표를 만들어내야죠. 그게 정치죠. 그렇지 않으면 이념집단이고.”
-조중동과도 필요하면 인터뷰를 하시더군요.
“저는 조중동의 독자도 우리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는 첫번째 만나는 국민이에요. 맘에 안 든다고 만나지 않으면, 조중동이 아니라 조중동의 독자인 국민까지 포기하는 거예요. 잘못 보도하면 공식 대응하고요. 다만 지금 종편하고는 인터뷰를 안 합니다. 미디어법 날치기에 반대한 이상, 그 결과로 만들어진 종편과 인터뷰하는 건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그 문제도 일정시간 지난 다음에는 다시 정해야겠죠.”
1960년 경기도 포천의 기지촌에서 태어난 박선숙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동네 전체가 쇠락하는 걸 목격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치원이 없는 동네라서 다섯살 반에 초등학교를 입학했고, 총명한 둘째 딸을 “편애”한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서울 이주를 결행한 덕분에 중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친구 따라” 수도여사대(세종대 전신) 역사학과에 진학하고 “친구 따라” 야학에 갔다가 학생운동에 참여한 그는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참여하면서 김근태 의장과 인연을 맺습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김대중 후보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김 대통령의 임기 내내 대변인 및 공보수석으로 청와대를 지켰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2년간 환경부 차관을 지낸 후에는,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 정동영 대통령 후보, 18대 총선,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19대 총선 등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전략통’으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18대 국회에서는 경제금융 관련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1위 평가를 받고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일 잘하는’ 국회의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지독한 편애를 받은 이유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했지만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랑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남을 비판해야 할 때면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몇 바퀴를 헛도는 대화 끝에 그는 겨우 이렇게 입을 뗐습니다.
‘평생 인연’ 김근태에게 후회되는 한 가지
“우리 집이 시골에서 꽤 큰 집이어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하숙을 하셨어요. 하숙하던 선생님 손을 잡고 학교도 일찍 가게 된 거예요. 그때 선생님들이 어머니께 이야기를 하셨겠죠. 얘는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웃음) 그냥 선생님들이 주신 책을 재미있게 읽고, 아이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질문을 하는 정도지, 별로 특별한 애는 아니었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거의 유복자죠. 경기도 사람들이 말이 많지 않고 덤덤해요.”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운동하고 정치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나요?
“저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저의 존재를 불편해하더라고요, 쟤는 뭐야 하면서.(웃음) 그런데 제가 좀 둔한 편이에요. 학연, 지연이 없다는 게 얼마나 불리한지를 나중에야 알았어요. 80년대 초에도 메이저대학 팀들이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데, 우리는 조그만 구멍가게 하듯이 우리끼리 해보겠다는 독립성이 강한 편이었어요. 민청련은 언더서클, 비합법조직들이 가진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면을 깬 수평적 조직이었고요. 모든 대학이 동등한 의결권을 갖고 나이가 많든 적든 동일한 발언권을 가졌죠.”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 민청련이 반(半)공개적인 조직을 꾸린 게 인상적입니다.
“김근태 의장과 지도부는 공개하되, 의사결정구조는 비공개였어요. 비공개 의사결정구조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하되, 정치적 탄압은 공개된 지도부가 감당하도록 만든 조직이지요. 한번은 민청련 지도부 선임을 놓고 77, 78학번 막내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김근태 의장이 토론을 주재하며 무려 17시간 동안 회의한 일이 있어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의 힘을 보여준, 착하고, 맑고, 민주적인 사람이었죠. 민청련 선배들은 말할 자유도 주고, 말하지 않을 권리도 줬어요. 다만 음식을 가리며 편식하는 저에게 그것만은 안 된다고 뭐라고 했었죠.(웃음)”
-김근태 의장이 고문당하는 걸 보면서 두렵지는 않았나요?
“두렵고 끔찍했지요. 김 선배만이 아니고 선배들 여럿이 고문당했지요. 그러면서 민청련의 조직을 지켜낸 거죠. 저희 후배들을 말이죠. 두려움과 죄책감이 그때 그 일들을 버텨내는 힘이었어요. 마치 80년 ‘광주 이후’ 민청련이 제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처럼요. 살아있어도 숨 쉬는 게 불편했어요. 81년에 유인물 만들어 뿌렸다가 대공분실에 잡혀가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많이도 맞았어요. 85년에 구로 동맹파업 지지시위 했을 때는 닭장차 안에서 불 꺼놓고 밟는데, 휴, 잘못하면 죽는 줄 알았어요. 서울역 앞에서 또 잡히고. 하여간 85년에는 뭐가 낀 것처럼 길거리만 나가면 붙잡혔어요. 제가 좀 느렸거든요. 그래도 마음의 빚, 미안함, 죄책감에 비하면 두들겨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싶더라고요.”
-김근태와의 평생 인연을 생각할 때 후회되는 게 있다면?
“95년에 근태 형이 저를 디제이에게 보냈어요. 평소 말수가 적어 ‘크레믈린’으로 불리던 저에게 정당 부대변인을 하라니 정말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았지요. 못하겠다고 버티는데, 김 선배가 30년 만남 동안 그때 딱 한번 저에게 화를 냈어요. 개인적인 문제로 세상과 담을 쌓고 있던 저를 억지로 세상에 내보낸 거예요. 그 뒤에도 김 선배를 계속 만났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내가 디제이 사람이라서 김 선배에게 하는 말이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좀더 열심히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청와대 일을 하느라 너무 힘들었죠. 후회되는 일은… (한참 망설이다가) 오래전에 ‘형은 그만하고 인재근 언니(부인) 시키면 어때요? 선배는 정치에 잘 안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형도 ‘맞아. 그렇지? 좀 그래. 인재근이 하면 더 잘할 거야’ 말씀하셨지만 속은 상하셨을 거예요.”
-내성적인 성격이라 대변인 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백 명 가까운 거친 남자 기자들이 있는데 여자로 혼자 들어가서 벌벌 떨었어요. 기자들도 그때의 제가 엄청 불쌍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 별명이 ‘무상녀’(무작정 상경 소녀)였어요.(웃음) 누구랑 시선이 마주칠까봐 고개도 못 들고 지내는데, 어떤 기자가 와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됐어요. 이번에 제가 인터뷰를 거절하자, 김 교수님이 ‘나쁜 사람 아니니 한번만 만나 달라’고 하셨죠?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95년 당시와 똑같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제가 또 넘어갔어요.(웃음)”
-디제이가 박 의원에 대해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겉 보고 속지 마라. 겉은 버드나무처럼 부드럽지만 속에는 철심이 있다.” 어떻게 그런 인정을 받으셨나요?
“디제이는 질문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하고의 대화가 제일 싫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사람이나 어떤 문제에 대해서 늘 질문하시는데, 기자들이나 정치인들이 김 대통령을 많이 어려워하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그분이 어렵지 않았어요. 정치적으로 뭔가 얻어내겠다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대통령이나 대변인은 역할의 차이일 뿐이에요. 대등하게 토론할 수 있어요. 저는 그걸 민청련에서 배웠어요. 그분의 마음이 상할까 그분이 뭘 들으면 좋을까 계산하기 시작하면 이미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에요. 그럴 경우에 그분은 이미 알아채요. 그분께도 더이상 대화가 유용하지 않은 거지요. 사실은 굉장한 인내와 겸손으로 사람을 대하는 김 대통령의 태도가 저에게 많은 기회를 준 거죠.”
전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제 존재를 불편해하더라고요
학연·지연이 없다는 게 얼마나
불리한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낯가림 심하던 대변인 초기
기자들 앞에서 벌벌 떨었어요
그때 위로가 된 한마디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민간인 사찰, 정치인이 관료 탓해선 안돼 -세대 차이를 넘어서 호흡이 잘 맞았군요. “저는 근본 없는 집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서 남녀차별이나 세대차이의 경험이 없어요. 어렸을 때 같은 집 살던 선생님들도 오빠나 친구처럼 저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주셨거든요. 세상 사람이 다 그런 줄 알았어요.(웃음)” -김근태, 김대중의 사람이라서 노무현 대통령과는 껄끄럽지 않았나요? “저도 동의하지 않고 노 대통령도 모르는 상황에서 환경부 차관 임명 보도가 나가서 힘들었던 적은 있죠. 탄핵 직전이라 대북송금 특검 때문에 호남과 디제이 지지자들이 큰 상처를 입은 시기였어요. (디제이와의 화해를 보여줄)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노 대통령은 제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죠. 나중에 차관 교체 시기가 됐는데도 ‘잘하고 있는데 바꿀 이유가 없다’며 2년을 채우도록 하셨죠.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다 공통점이 샤이(shy)해요. 낯가림이 심한데 속은 철심이고.” -노회한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환경부는 센 부서가 아니면서 센 부서에 딴지를 거는 역할이라 다른 부처의 법률을 전부 봐야 해요. 덕분에 2년 동안 수업료 안 내고 세게 공부했어요.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선발해 우수하게 훈련시킨 사람들인데, 어떤 대통령이냐에 따라서 일의 방향, 범위, 에너지, 열정의 수위가 달라져요. 이명박 대통령의 중요한 잘못이 공무원들을 이렇게 망가뜨린 거예요. 민간인 사찰 조직이 처음 만들어지자마자 저는 제보를 받았어요. 이렇게 공무원이 할 일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한 것, 그리고 너무 핵심에서 벌어진 일이라 두려워서 다들 눈을 감게 한 것은 명백히 대통령 책임이죠. 정치인이 잘못해서 관료들과 정부조직이 잘못 돌아가는 거지, 정치인이 관료를 탓해서는 안 돼요.” -운동권이나 정치인이 안 됐다면 뭘 하고 계실 것 같아요? “역사 선생님? 임용고시가 너무 어려워 통과가 안 됐겠지만요.(웃음) 시험을 잘 못 봐요. 사지선다가 안 맞아요. 왜 이렇게 묻는 거야, 의심이 생기거든요. 차관 그만두면서는 인터뷰어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치에 뛰어들면서 이제는 중립지대로 나올 수 없게 됐죠. 그건 좀 아쉬워요.” 박선숙은 조용하고 신중한 가운데 진심을 정확하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요약하는 데 애를 먹었을 정도로 말 한마디 버릴 게 없었습니다. 거친 기자들 사이에서 최장수 대변인으로 살아남은 것도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권력자였더라도 대변인이나 비서실장을 믿고 맡겼을,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역할이 여기서 멈출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만 망설이는 그를 끌어내는 게 매번 문제일 텐데, 힌트를 드리자면, 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열쇳말은 “나쁜 사람 아니니 한번만”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열쇳말이 도움이 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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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견학 온 안산 디자인문화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강재훈 선임기자
제 존재를 불편해하더라고요
학연·지연이 없다는 게 얼마나
불리한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낯가림 심하던 대변인 초기
기자들 앞에서 벌벌 떨었어요
그때 위로가 된 한마디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민간인 사찰, 정치인이 관료 탓해선 안돼 -세대 차이를 넘어서 호흡이 잘 맞았군요. “저는 근본 없는 집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서 남녀차별이나 세대차이의 경험이 없어요. 어렸을 때 같은 집 살던 선생님들도 오빠나 친구처럼 저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주셨거든요. 세상 사람이 다 그런 줄 알았어요.(웃음)” -김근태, 김대중의 사람이라서 노무현 대통령과는 껄끄럽지 않았나요? “저도 동의하지 않고 노 대통령도 모르는 상황에서 환경부 차관 임명 보도가 나가서 힘들었던 적은 있죠. 탄핵 직전이라 대북송금 특검 때문에 호남과 디제이 지지자들이 큰 상처를 입은 시기였어요. (디제이와의 화해를 보여줄)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노 대통령은 제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죠. 나중에 차관 교체 시기가 됐는데도 ‘잘하고 있는데 바꿀 이유가 없다’며 2년을 채우도록 하셨죠.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다 공통점이 샤이(shy)해요. 낯가림이 심한데 속은 철심이고.” -노회한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환경부는 센 부서가 아니면서 센 부서에 딴지를 거는 역할이라 다른 부처의 법률을 전부 봐야 해요. 덕분에 2년 동안 수업료 안 내고 세게 공부했어요.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선발해 우수하게 훈련시킨 사람들인데, 어떤 대통령이냐에 따라서 일의 방향, 범위, 에너지, 열정의 수위가 달라져요. 이명박 대통령의 중요한 잘못이 공무원들을 이렇게 망가뜨린 거예요. 민간인 사찰 조직이 처음 만들어지자마자 저는 제보를 받았어요. 이렇게 공무원이 할 일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한 것, 그리고 너무 핵심에서 벌어진 일이라 두려워서 다들 눈을 감게 한 것은 명백히 대통령 책임이죠. 정치인이 잘못해서 관료들과 정부조직이 잘못 돌아가는 거지, 정치인이 관료를 탓해서는 안 돼요.” -운동권이나 정치인이 안 됐다면 뭘 하고 계실 것 같아요? “역사 선생님? 임용고시가 너무 어려워 통과가 안 됐겠지만요.(웃음) 시험을 잘 못 봐요. 사지선다가 안 맞아요. 왜 이렇게 묻는 거야, 의심이 생기거든요. 차관 그만두면서는 인터뷰어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치에 뛰어들면서 이제는 중립지대로 나올 수 없게 됐죠. 그건 좀 아쉬워요.” 박선숙은 조용하고 신중한 가운데 진심을 정확하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요약하는 데 애를 먹었을 정도로 말 한마디 버릴 게 없었습니다. 거친 기자들 사이에서 최장수 대변인으로 살아남은 것도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권력자였더라도 대변인이나 비서실장을 믿고 맡겼을,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역할이 여기서 멈출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만 망설이는 그를 끌어내는 게 매번 문제일 텐데, 힌트를 드리자면, 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열쇳말은 “나쁜 사람 아니니 한번만”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열쇳말이 도움이 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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