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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대통령 총선개입’…잣대는 ‘그때그때 달라요’

등록 2008-03-24 18:02수정 2008-03-24 18:15

2004년 3월12일치 <동아일보> 사설.
2004년 3월12일치 <동아일보> 사설.
이 대통령 ‘취약지 방문, 지역개발공약’ 발표 등 ‘총선 간접지원’ 피력
민언련 논평 “보수언론의 2004년 비판잣대, 이번 총선 앞두고는 사라져”

2004년 2월2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아 방송기자클럽에서 주최한 특별회견에서 약 50일 앞으로 다가온 17대 총선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당시 노 대통령은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대통령이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통령 입장에서 의석을 많이 확보해야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수롭지 않게 ‘직설적 화법’으로 자신의 희망사항을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 발언이 빌미가 돼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 대통령’이 됐다.

보수언론과 야당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선거중립 위반’이라고 단정짓고, ‘탄핵 정당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중앙·동아 등은 3월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될 때까지 연일 노 전 대통령의 ‘선거개입’을 비난하고,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탄핵의 정당성을 퍼뜨렸다.

■ 조선·동아, “대통령의 위법 제어장치 탄핵뿐”=4년 전, <조선>은 3월 6일 사설 ‘국민이 탄핵론에 망설이는 진짜 이유’에서 “청와대가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에 대해 위법이라고 한 중앙선관위의 결정을 무시하고 나선 것은 헌정 질서와 법치주의를 뒤흔들 만한 중대 사태”라며 “대통령의 법 위반을 제어할 장치는 사실상 국회의 탄핵소추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11일에도 사설 ‘깨끗이 사과하든지, 표결을 막지 말든지’에서 “야당의 탄핵안 발의는 합법적 절차를 밟은 것”이라고 탄핵의 정당성을 대변했다.

<동아>는 2월 26일 사설 ‘노 대통령, 정말 탄핵 받으려는가’, 3월 4일 사설 ‘노 대통령, 선관위 결정 존중해야’ 등을 통해 “노 대통령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탄핵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탄핵 직전인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같이 ‘청와대 탄핵 대응 이래선 안 된다’, ‘결국 노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 ‘노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해야 할 말’ 등의 사설로 압박하더니, 12일 사설 ‘누구를 위한 정면승부인가’를 통해 노 대통령의 현실인식과 위기대처 능력이 이 정도라면 불행히도 탄핵안 표결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고 ‘선언’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4년 3월12일치 <조선일보> 사설.
2004년 3월12일치 <조선일보> 사설.
■ 이 대통령 ‘선거 개입’ 논란= 4년이 흘러 다시 총선을 앞둔 요즈음,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 개입’ 논란이 한쪽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대통령이 강원 춘천·대전·광주 등 상대적으로 한나라 후보가 약한 지역에서 각 부처 업무보고를 가진 데 이어 지역개발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는 공약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것도 논란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4일 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에서는 한승수 총리의 출생지를 겨냥해 “새 내각은 강원도 내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5대 SOC사업과 동해안 발전사업 지원 등을 약속했다. 20일과 21일 대전 대덕연구단지와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열린 교육과학기술부, 환경부 업무보고에서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사업 조기 검토”,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광주 유치 적극 지원” 등을 약속했다. 앞서 17일 경북 구미를 방문했을 때는 “구미공단 확대”를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8일 전북 군산 방문시에는 “군산은 제2의 고향”이라고 발언한 데 이어 “새만금 관광개발 연내 착공”을 지시했다.

발언도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이 대통령은 23일 경제신문 공동 기자회견에서 ‘4.9 총선’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줄 때보다 국제 환경이 훨씬 더 나빠졌는데,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지를 현명한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직접적으로 ‘여당’표를 주문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를 살리려면 여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해야 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장·차관 워크숍에서도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시절에는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다”고 해, 총선에서 여당 후보에 힘을 실어줄 것을 에둘러 표현한 바 있다.

■ 대통령의 총선개입 발언 보수언론 ‘이중잣대?’=이 대통령의 총선 관련 발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다. 야당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우상호 통합민주당 대변인은 17일 브리핑에서 “이 대통령의 선거개입이 너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서 “군산은 제2의 고향이라고 발언했고 구미공단을 넓힐 수 있도록 선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즉석에서 검토해 보라고 지시한 것은 노골적인 선거운동”이라고 비난했다. 정동영 전 대선후보도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이 있다”면서 “4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 좀 많이 됐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 결국 탄핵으로까지 이어진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렇게 대통령이 특정 후보자가 선거 운동하는 자리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선거법 위반의 소지가 크다”며 “관권선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징후가 보인다”고 비판했다.

정치권 논란은 확산되고 있지만 언론은 조용하다. 4년전과 판이한 상황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과 야당 지도자의 비판, ‘이 대통령 총선개입 논란’을 단순 보도하는 선에 머물고 있다. ‘이중잣대’라는 논란이 나오고 있다. 민언련은 지난 20일 논평을 내어 언론의 이런 행태를 비난했다.

민언련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탄핵감’으로 몰고갔던 보수신문들의 잣대로 보면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선거개입’으로 비판받을 만하다. 2004년 노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여당 지지에 대한 ‘희망사항’을 직설적으로 말했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각 지역에 맞게 정부를 홍보하고 ‘정치적 안정’을 강조함으로써 여당을 간접 지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사설과 칼럼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기사조차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들 언론은 이 대통령의 ‘강원도 내각’ ‘정치 안정’ ‘경제 성장’ 등 논란의 발언들을 단순 보도했을 뿐이다. <조선>은 15일 ‘이 대통령 이번 내각은 강원도 내각’ 기사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는 데 머물렀다. 19일에도 ‘이 대통령 선거 개입 논란’, ‘경제 대통령의 거듭된 경제 위기론’ 등의 기사를 통해 이 대통령의 발언과 야당 지도자의 비판을 단순 절달하는 데 그쳤다. <동아>는 ‘지금은 오일쇼크 이후 최대 위기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3월17일치) 기사와 <중앙>의 ‘손학규 “이 대통령 선거 개입 말라”(3월18일치) 등의 기사에서도 이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삼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중앙>은 19일 기사에서 “야당 지도부가 앞다퉈 이명박 대통령의 ‘총선 개입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청와대가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며 청와대의 대응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민언련 박진형 간사는 “언론이 어떤 한 사안에 대해 지적을 하려고 한다면, 일관된 기준을 갖고 국민을 헷갈리지 않게 해야 한다”며 “4년 전 선거개입 주장으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가는 데 기여했던 잣대에 따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 대통령의 선거개입 논란에 대해서도 언론이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향신문>이 24일 사설 ‘이 대통령은 총선 행보 자제해야’에서 이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은 가급적 정치적 행보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며 “이 대통령은 4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문제삼아 탄핵까지 몰고갔던 당사자가 지금의 여당인 한나라당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야당일 때는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을 빌미로 탄핵까지 결행해놓고 이제 여당이 됐다고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명분이 없다. 이 대통령은 이쯤에서 총선행보를 멈추고 국정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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