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 말투·감정 고스란히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한-일 관계와 관련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공개함으로써, 최근의 대일 강경기조를 ‘스스로’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공개한 글을 4~5일 전부터 직접 준비해 왔으며, 이날 아침까지도 마지막 손질을 계속했다고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김 대변인은 글이 공개되기 전에 주변 참모들과 상의했는지에 대해 “참모들과 충분히 의논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글의 내용에 노 대통령의 개인적 감정이나 평소 어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실제 참모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이날 글을 포함해 최근의 대일 강경기조가 노 대통령 주변의 외교안보 분야 참모들의 ‘건의’에서 시작됐다는 흔적이 거의 없다. 한 핵심 참모는 “최근의 대일 강경기조는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 주무부서인 외교통상부는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관련 당국자들은 “노 대통령의 생각이 앞으로 대일정책의 기조가 될 것”이라거나 “노 대통령의 시각을 한일 관계에 충실히 반영할 것”이라는 말만 할 뿐,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직설적인 표현이 대일관계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특히 독도 영유권과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일 간에 긴장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성명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의 편지라는 이례적인 형식으로 일본을 강도 높게 비판한 데 대해선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말을 아끼던 한 당국자는 “일본으로선 연타를 맞은 느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언으로 오는 여름으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셔틀 정상외교도 완전히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 일본 쪽에서는 이미 부정적인 전망이 나온 바 있다. 김만수 대변인은 그러나 “기본적으로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라며 “일본 쪽과 협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노 대통령과 정부의 기본입장은 과거사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왕에 예정됐던 경제·문화적 교류 협력은 중단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이날 발언을 포함해 최근 한달 동안 대국민 메시지를 다섯 차례 내보낼 정도로 ‘온라인 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각각의 메시지는 그 형식과 대상을 조금씩 달리하기는 하지만 노 대통령이 직접 작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달 18일 전국 공무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시작으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사퇴 관련, 행정중심 복합도시 관련 서신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한나라당은 이날 발언에 대해 “당연한 대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 대표는 “대통령으로서 일본에 시정 조처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고 이정현 당 부대변인이 전했다. 한나라당은 정부가 ‘조용한 외교’에서 벗어나 ‘적극적 외교’로 일본을 상대하라고 요구해 온 만큼, 노 대통령의 ‘감정 수위’가 당과 비슷해졌다고 평가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박근혜 대표는 일본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비판해 왔다”며 “노 대통령의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백기철 유강문 기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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