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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과거사에 “가슴 아프다”는 기시다…“대상 불명확한 표현”

등록 2023-05-08 21:06수정 2023-05-09 02:41

일 역대 과거사 발언 수위 비교
아키히토 전 일왕 “통석의 염” 시대로
전문가 “세계대전 일본인 포함될 수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향해 공식적 사죄나 반성 대신 개인적 안타까움을 표시한 것은 무라야마 담화(1995), 한-일 파트너십 선언(1998),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담화(2005)에 한참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고 한국 등에 ‘더 이상 사과할 수 없다’는 취지의 아베 담화(2015)가 나오면서, 지난 과거에 대해 명확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 앞선 담화들을 무력화한 사정이 작용했다. 그 결과 기시다 총리의 발언 역시 일본의 명확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 감정을 토로한 1990년대 초 아키히토 일왕의 ‘통석의 염’ 시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시다 총리는 7일 한-일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등 과거사 문제를 두고 사견임을 전제로 “저는 당시 혹독한 환경 아래 다수의 분들께서 대단히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직접 입에 올리지도 않고, 총리로서가 아닌 개인적 의견을 말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며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인들도 고생했기 때문에, 일본인을 포함한 발언으로도 생각될 수가 있다. 교묘하게 주어를 생략한 표현”이라고 짚었다.

과거 일본 총리나 총리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의 발언에 견줘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발표한 담화에서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직접적으로 사죄와 유감의 뜻을 밝혔다.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는 1998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최초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공식문서화했다.

태평양전쟁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며 주변국의 비판을 받은 고이즈미 전 총리조차 2005년 담화에서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크고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며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한다”고 했다.

방한 일정을 마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8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전용기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방한 일정을 마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8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전용기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기시다 총리의 이번 발언이 ‘일본 총리로서의 나름의 절충안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이후 우경화가 거세진 일본 사회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것이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국 정부가 (지난 3월) 내놓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안(제3자 변제)에 대해 한국 내 비판 여론이 강한 상황에서, 일본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윤석열 정부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지만, 과거사 사죄 등에 반대하는 일본 내 극우세력의 반발이 있기 때문에 사죄와 반성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가 전날 기자회견에서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한 것은 결국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담화를 넘어서지 않는 수준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기시다 총리가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계승한다고 한다면, 결국 일본에서 낸 과거사 관련 담화 중 가장 최근 것(아베 담화)을 계승할 수밖에 없다”며 “그의 발언은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계속 짊어지게 할 수 없다’고 말한 아베 전 총리의 담화와 닮아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을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과 견주는 전문가도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모호하다는 점을 볼 때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아키히토 일왕이 ‘통석의 염’이라고 언급한 것과 비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통석의 염’은 ‘몹시 애석하게 생각하는 마음’ 정도로 해석된다. 당시 이 발언을 두고 한국 쪽에서는 ‘유감’ 정도의 표현이며 ‘사죄’의 의미는 담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론이 일었다.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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