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가 8·28 전당대회 지역 순회 경선 제주지역 합동연설회가 열린 지난 7일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 이승만과 함께 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다가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제헌의회 부의장, 의장이었던 해공 신익희는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습니다. 호남 지방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뇌내출혈로 급사했습니다. 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습니다. 그 뒤 진보당을 창당해 당수가 됐는데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처형됐습니다. 사법살인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유석 조병옥은 1956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됐고 1960년 민주당 공천을 받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습니다. 선거를 한달 앞두고 미국에서 병사했습니다.
옛날 자유당 때 얘기를 갑자기 꺼낸 이유는 민주당 계열 야당 대표, 특히 대선주자급 거물 정치인들이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입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아시는 분들이 많을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보다 더 힘든 ‘극한직업’이 있습니다. 야당 대표입니다. 대통령은 힘들지만, 권력이 있고 보람이 있는 자리입니다.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으로 정치인과 관료들을 지휘해 국정을 이끌어갑니다. 야당 대표는 그처럼 막강한 대통령의 견제를 받습니다. 대통령과의 싸움도 힘겨운데 당 내부의 도전에도 맞서야 합니다. 역대 우리나라 야당 대표들이 다 그랬습니다. 이제 이재명 의원이 그 극한직업 대열에 합류합니다.
더불어민주당 8·28 전국대의원대회가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립니다. 대표 및 최고위원 당선자 발표는 오후 6시15분에서 6시25분 사이에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치러진 지역별 경선 및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재명 의원의 대표 당선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하지만 민주당 대표로서 이재명 의원의 앞날은 가시밭길인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이재명 의원을 강하게 압박할 것입니다. 국정 난맥을 이재명 탓, 야당 탓으로 떠넘기려 할 것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수사와 기소로 이재명 의원을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이른바 보수 성향 언론은 이재명 의원과 민주당을 집요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정치인 이재명의 삶은 8·28 전당대회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입니다. ‘정치 인생 2막’, ‘고난의 행군’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재명 의원은 3·9 대통령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당대회에도 출마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다음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대표가 되는 것은 이재명 의원 개인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성취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몇가지 허점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깃발이 희미해졌습니다.
이재명 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것은 그가 민주당 경선 후보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가치관과 정책 노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사회를 제대로 한번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기본소득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대선을 치르며 기본소득 공약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공약이 뚜렷하게 남은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대선 후보 이재명의 가치관과 정책 노선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지경이 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둘째, 신비감이 걷혔습니다.
이재명 의원에게는 신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소년공 출신으로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습니다. 경기도 성남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런 노력을 평가받아 성남시장, 경기지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 전당대회를 거치며 신비감이 걷혀버렸습니다. 그동안의 성취가 출세를 위한 탐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셋째, 승리 지상주의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거는 경쟁 상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주권자인 국민의 선택을 받는 절차입니다. 경쟁 상대와 치열하게 논쟁할 때도 늘 국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재명 의원은 경쟁 상대와 싸워서 이기는 데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 출마 선언문의 제목은 ‘이기는 민주당을 만들겠습니다’였습니다.
넷째,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입니다.
과거 제왕적 총재들은 국회의원 공천을 좌지우지하면서도 자기 당의 국회의원들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입니다. 전문 정치인입니다. 대의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의 주체입니다. 정치 선진국 대부분이 내각책임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재명 의원은 ‘여심’(여의도 국회의원)과 당심·민심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전자민주주의로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원의 집단지성을 당의 의사결정에 활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민주주의 확대는 자칫 반정치주의,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재명 의원의 허점은 반대로 해석하면 강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진보적인 가치관과 정책 노선에 현실성을 보강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막연한 신비감을 걷어내고 현실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대선주자에게 필요한 전투력과 팬덤을 확보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이재명 의원이 차차 입증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첫째, 싸워야 합니다.
대외적인 과제입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야당입니다. 윤석열 정부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잘할 것입니다. 이재명 의원은 본래 싸움꾼입니다.
둘째, 통합해야 합니다.
대내적인 과제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후보를 찍은 사람 가운데 민주당에 등을 돌린 사람이 많습니다. 복원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도층과 보수층을 흡수해야 합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합니다. ‘싸우는 이재명’이지, ‘통합하는 이재명’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의원은 민주당 안에서 오랫동안 ‘변방의 비주류’였습니다. 호남 출신도 아니고, 친노·친문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여전히 일종의 피해 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자고 이야기를 조금만 삐끗하면 침소봉대해서 본질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요즘 말하기가 불편하고 힘들다.”(8월1일)
“모든 영역에서 모든 방향에서 (저를 향해) 최대치의 공격이 이뤄지고 있다. 저도 인간이라 가끔 지치기도 한다.”(8월4일)
“마녀가 아닌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마녀인 증거를 본인이 내셔야죠.” “아닌 증거를 내라면서요. 그러니까 그런 건 조심해주시면 좋겠습니다.”(8월10일)
지난 20일 전북 전주 화산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최고위원 후보자 전북 지역 합동연설회’에서 박용진 후보(왼쪽), 이재명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제 사고와 태도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명 의원은 민주당의 대표입니다. 비주류가 아닙니다. 주류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공격을 받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재명 의원 자신도 야당 대표, 야당의 대선주자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13주기인 8월18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5번의 죽을 고비와 55번의 가택연금, 6년간의 수형 생활, 777일의 해외 망명 등 인생 대부분을 고난과 역경 속에 보내셨음에도 정치가 국민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굴곡의 삶을 겪었고, 앞으로 어떤 시련이 도사린다 한들 감히 김대중 대통령님의 삶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혹독한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인내하여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인동초처럼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두가지만 추가하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연설을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을 실제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대중과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영화 <서편제>를 좋아했고, 가수 서태지를 좋아했습니다.
이재명 의원이 배워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을 사랑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국민이 사랑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