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숙 전 청와대 공보수석이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다. 정치를 할 때는 보수 정당·언론으로부터 ’빨갱이’ ‘대통령병 환자’라는 엄청난 공격에 시달렸지만, 지금 김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얘기를 정치권에서 듣기는 어렵다. 대통령으로서 공과는 차치하고라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고, 40% 득표로 집권한 ‘소수파 대통령’이었음에도 아이엠에프(IMF) 사태와 남북정상회담 등 여론이 갈라질 수 있는 민감한 현안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추진한 점이 높이 평가받기 때문일 것이다.
디제이(DJ)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대통령’이란 자리를 어떻게 생각했고 국정운영의 성공을 위해서 무엇을 가장 중요시했을까.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을 지낸 박선숙씨를 14일 만나 디제이의 ‘대통령 노하우’를 물었다. 박 전 수석은 김대중 정부 5년간 청와대에서 줄곧 근무한 두명의 비서관(또 한사람은 박금옥 총무비서관) 중 한사람이다.
― 요즘 들어서 부쩍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대선에서 박빙의 차이로 승리한 ‘소수파 대통령’이었는데도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 대통령은 권력 기반의 취약함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까?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 이런 점을 고려했나요?
“선거는 지지자들과 함께 치릅니다. 그러나 당선되면 반대편까지 포용하는 국민의 대통령이 되어야지요. 디제이는 소수파여서 오히려 기회가 열렸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지자들만의 힘, 자기 편끼리 밀어붙여도 된다는 다수파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디제이는 1997년 대선 때 김종필 후보의 자민련과 후보 단일화를 하고, 박태준씨까지 함께 하고, 이인제 후보가 여권 표를 500만표 가까이 잠식하고, 외환위기가 닥쳤음에도 겨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이런 정치 지형을 염두에 두고 국정운영을 했습니다. 보수인 김종필·박태준·이한동 총리에게 정부를 믿고 맡겼고, 자민련이 추천한 경제팀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구여권 출신인 자민련에 비교적 공직 경험 있는 인사들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고, 김 대통령이 갖고 있는 관료에 대한 평소의 소신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디제이는 ‘공무원은 정부가 육성한 좋은 자산이다, 공무원이 잘 해내는가 여부는 대통령하기 나름이다. 방향을 잘 제시해서 믿고 맡기면 된다’고 늘 이야기했습니다.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니까 공직사회가 완전히 물갈이되지 않을까 공포심이 컸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와대부터 내각까지 청산은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전 정부의 비서관들은 일정 기간 함께 일하다가 자리를 찾은 뒤 교체됐지요. 내각에서도 김영삼 정부에서 임명된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이 2년 남은 잔여 임기를 채웠고, 역시 김영삼 정부의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됐습니다. 포용은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숙명 같은 과제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는 박선숙 전 청와대 공보수석.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김대중 대통령은 4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정치인 김대중에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그에게는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겐 꿈과 비전이 있었고,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도달해야 할 한 고지였습니다. 그는 1971년 첫 대선 때의 비전과 공약을 97년 대통령 당선 이후 실행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십년 묵은 비전과 공약이 시대에 맞겠나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 통치에 짓눌려 수십년간 정체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1997년 외환위기는 그 결과였던 셈이죠. 1971년 대선 때 디제이의 공약은 파격적일 만큼 선명한 개혁성을 보였습니다. 독재에 반대하는 대중민주주의, 북진통일 구호가 지배하던 시절에 남북한 화해교류 및 평화통일론을 내걸었지요. 예비군제 폐지와 재벌 중심 경제에 반대하는 대중경제론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디제이가 재임 중 ‘좀더 일찍 대통령이 됐더라면…’이라고 탄식한 적이 있어요. 그랬다면 우리나라가 환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의 표현이었죠. 저는 ‘더 빨리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일찍 대통령이 됐다면 어쩌면 혼란을 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이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하게 했습니다.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입니다. 하나회 해체는 군사 쿠데타를 방지해 디제이의 집권가능성을 높여줬고, 금융실명제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개혁의 기초로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정권교체라는 큰 강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외환위기라는 어려움 속에 비로소 기회가 주어졌다고 봅니다.”
― 한국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을 많이 받는데, 김 대통령은 정치제도로서 대통령제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셨나요?
“디제이는 제왕적 대통령이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권력의 분산과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디제이피(DJP) 공동정부 운영에서도 사실상 내각제적인 요소를 국정 운영에 도입했고요. 무엇보다 그는 의회주의자였습니다. 국회가 입법부로서만이 아니라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내각제는 권력의 분산·견제와 균형을 위한 제도이지만, 의회가 그만큼 성숙하고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중심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국회에 그 권한을 넘기는 내각제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국회가 미덥지 못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일 겁니다.”
2017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7주년 기념전시회’엔 김 대통령이 직접 쓴 ‘대통령수칙 15개항’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디제이의 수칙 15개항은 이랬다.
『1. 사랑과 관용 그러나 법과 질서를 엄수해야. 2. 인사정책이 성공의 길이다.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 3.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충분한 휴식으로 건강을 유지. 4. 현안파악을 충분히 하고 관련 정보를 숙지해야. 5. 대통령부터 국법준수의 모범을 보여야. 6. 불행한 일도 감수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하도록. 7. 국민의 애국심과 양심을 믿어야 한다. 이해 안 될 때는 설명방식을 재고해야. 8. 국회와 야당의 비판을 경청하자. 그러나 정부 짓밟는 것 용서하지 말아야. 9. 청와대 이외의 일반시민과의 접촉에 힘써야. 10. 언론의 보도를 중시하되 부당한 비판 앞에 소신을 바꾸지 말아야. 11. 정신적 건강과 건전한 판단력을 견지해야. 12. 양서를 매일 읽고 명상으로 사상과 정책을 심화해야. 13. 21세기 대비를 하자.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명심해야. 14. 적극적인 사고와 성공의 상(像)을 마음에 간직. 15. 나는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같이 계시다.』
김대중 대통령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직접 쓴 ’대통령수칙’. 김대중도서관 제공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노트. 재임 5년간 27권을 썼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 27권의 국정노트와 ‘대통령수칙’은 어떤 경위로 작성하신 건가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집권 초기에 장관 보고를 받으실 때였는데, 대통령이 파란 커버의 대학노트를 한권 들고 오시더라고요. 그 노트를 펴놓고 보고를 받고 또 질문도 하시고, 그렇게 업무보고나 국무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 때도 항상 ‘국정노트’를 들여다보셨는데, 나중에 퇴임하고 보니 그게 27권 분량이 되더라구요. 그걸 보고 아, 대통령이 이렇게 정책현안의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하셨구나 생각했죠. 대통령수칙은 저도 정확히 언제 만드신 건지 모르겠어요. 1997년 12월18일 대선일에 일찍 투표를 끝내고 일산 자택의 서재에 들어가셔서 하루종일 혼자서 뭔가를 정리하셨어요. 그때 초안을 쓰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항상 그 수칙을 읽으시며 마음을 다잡으셨겠지요. 수칙 2항을 보면 ‘인사정책이 성공의 길이다.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윤석열 대통령도 디제이의 대통령수칙과 국정노트를 한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모든 대통령의 고민은 다 비슷할 겁니다. 전임 대통령들이 어떻게 국정에 임했는지를 살펴보는 건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 그걸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매우 성실하고 꼼꼼한 분이었던 거 같습니다. 역대 모든 대통령들이 다 그러했겠지요. 성실함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일까요?
“대통령에게 필요한 가장 좋은 품성은 성실함인 거 같고요, 특별한 것은 통찰력인 거 같습니다. 김 대통령이 얼마나 성실했냐 하면, 매일 밤 공보수석실에서 신문 가판(그때는 전날 저녁에 신문 가판을 인쇄해 배달했다)의 기사를 스크랩해서 대통령 관저로 보고드렸습니다. 그 분량이 적게는 수십 페이지에서 많으면 1백 페이지까지 됐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거 다 보기도 힘들텐데, 김 대통령은 또 신문을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직접 읽으셨습니다. ‘스크랩 있는데 뭘 또 신문을 직접 보십니까?’ 물었더니, ‘스크랩에 빠졌어도 신문에는 우리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가 들어있다. 그 모든 문제에 대해 정치인은 답을 내야 하니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봐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성실하지 않으면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통찰력이란 건 디제이를 보면서 느꼈던 건데, 디제이가 재임중 항상 강조했던 게 정보기술(IT) 강국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1997년 대선 공약엔 ‘내가 대통령이 되면 안방에서 버튼 하나로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내용을 넣기도 했고요. 디제이가 컴퓨터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겠어요? 그때는 피시통신 시대라 다들 현실성 없는 공약이라고 했죠. 그런데 디제이는 정보기술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국민 대상 무료 인터넷교육으로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지요. 빌 게이츠나 손정의씨를 만나면 미래 기술에 대해 질문도 많이 했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짚어낼 수 있는 것, 그런 통찰력이 지도자로서 디제이의 특별한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대통령 비판기사도 많을텐데,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김 대통령은 언론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1999년 ‘옷로비 의혹 사건’(재벌 회장 부인이 남편의 구명을 위해 검찰총장 부인 등에게 고가의 옷을 선물했다는 의혹. 청와대 직속의 경찰청 조사과(사직동팀)가 이 사건을 내사하고도 은폐했다는 의혹까지 덧붙여졌다) 때는 김 대통령이 언론 보도에 ‘마녀사냥’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한 적도 있는데, 그때 언론 담당 참모로서 어떤 얘기를 대통령에게 했습니까?
“1999년 5월 옷로비 의혹사건의 와중에 대통령이 러시아와 몽골을 순방했어요. 김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 성과가 좋아 4강외교가 완성됐다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귀국 전 몽골에서 수행기자단 간담회를 열어서 이걸 좀 설명하고 싶어하셨어요. 그런데 첫번째 기자 질문이 ‘사직동팀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였어요. 디제이는 ‘그건 국내에 가서 말씀드리겠다’고 답했지요. 두번째 질문 역시 ‘사직동팀 해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였어요. 대통령이 ‘그건 국내에 가서…’라고 하자, 세번째 기자가 일어서 ‘사직동팀 언제 해체하실 겁니까?’라고 또 묻더라구요. 그걸 듣고 디제이는 ‘오늘은 이만 하자’며 자리를 떴지요. 국내 언론은 ‘대통령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보도했지만, 제가 바로 옆에서 본 바로는 대통령이 한숨을 크게 푹 쉬시고는 어깨가 축 쳐져서 나가신 거였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또다시 기자들에게 옷로비 질문을 받은 겁니다. 거기서 김 대통령이 ‘진실은 밝혀져야겠지만 마녀사냥식은 안된다’고 내심의 생각을 얘기해 버렸지요. 이걸로 또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결국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김 대통령도 억울하고 화는 나지만 ‘마녀사냥’이란 표현이 과했다는 건 아셨으니까 대국민 사과를 했던 겁니다.
김 대통령만큼 오랜 기간 언론에 외면당한 정치인도 없습니다. 유력 신문·방송에서 대놓고 ‘사상이 불온하다’고 수십년간 비난했고,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직후엔 정부 통제 탓이긴 하지만 ‘광주 유혈사태의 배후’라고 모든 언론이 지목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니까요. 대통령수칙 열번째 항목에 ‘언론의 부당한 비판에 소신 바꾸지 말아야’란 내용을 넣은 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걸 겁니다.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저한테 ‘기자는 우리가 만나는 첫번째 국민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사람이 기자니까 성실하게 답변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저는 이 말이 대통령과 언론 관계를 꿰뚫는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이 지지자 아닌 국민을 만날 기회가 사실 얼마나 있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23일 청와대에서 이희호 여사와 이돈명·한승헌 변호사, 이우정 교수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법 공포안에 서명하고 있다. 김대중 도서관 제공
― 디제이의 대통령수칙 두번째 인사에 관한 부분(인사정책이 성공의 길이다.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이 눈에 띕니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것도 인사 탓이 큰데,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기준에서 사람을 골라 썼습니까?
“대통령에게 인사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입니다. 대통령이 아는 사람 중에서 찾는다면, 내각이나 대통령실 등에 추천할 만한 인사가 얼마나 될까요? 디제이 역시 청와대나 내각에 직접 인선한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졌지요. 처음에는 인수위원회 단계에서 추천을 받았고, 그 뒤에는 민정수석실에서 다양한 경로로 추천받아 검증을 거쳐 복수의 후보를 보고하는 방식이었지요. 대통령이 직접 추천하지 않더라도 가족이나 측근의 사적 인연에 따른 추천을 최소화하려면, 추천 경로가 어떠한지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법무부에서 검증만 하겠다고 하면, 공식적인 추천 경로가 보이질 않습니다. 누가 추천해서 법무부 검증에 들어간 건지, 명료하게 절차를 만들고 대통령도 그런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디제이는 임기 초반에 대북정책의 세축인 국정원장(이종찬), 통일부 장관(강인덕),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임동원)에 모두 보수 인사를 임명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일수록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한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 거죠. 디제이도 교수 출신 인사들을 안 쓴 건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교수 출신은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고 의사 결정과 집행을 맡기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수의 전문성은 자기 분야에 국한한다고 보았던 것 같아요.”
― 대통령수칙을 보면 건강을 두번이나 언급하고 강조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이건 김 대통령이 고령에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요?
“대통령이란 직업이 엄청난 중노동이기 때문에, 잠 잘 시간이 부족하고 체력 소모도 아주 많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극심하고요. 건전한 판단력을 유지하려면 정신이 맑아야 하고, 정신 건강을 위해선 신체의 건강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고 김 대통령은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디제이는 고령에 다리도 불편했잖아요, 그래서 의무실 권유로 청와대 내부의 작은 수영장에서 걷기 운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술은 야당 총재하실 때만 해도 설렁탕 집에서 반주로 소주 반병은 하셨는데, 청와대 들어간 뒤로는 와인 한 잔 정도 외엔 거의 안 하셨습니다.”
― 대통령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을 꼽는다면,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도 피하지 못한 ‘대통령의 함정’은 무엇입니까?
“정보와 자료가 모이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다 보면, 대통령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이걸 ‘알아알아병’이라고 부릅니다. 대통령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면, 참모들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만장일치의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다가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 ‘사실 난 반대였어’라고 다들 발뺌을 하지요. 결국 다 대통령 책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핵심 측근들이 해야할 일은, 장·차관이나 외부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겁을 먹지 않고 할 말을 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덜어주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만의 세상’에 갇히지 않으려면,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반대 의견을 귀하게 듣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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