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 국무총리가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화와 타협, 공존과 상생은 민주공화국의 기본 가치이자, 지금 대한민국 공동체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정신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인 김부겸 총리가 1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내놓은 퇴임사다. 총리 시절 ‘공존’을 강조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강조했다. 김 총리는 “지금 갈등과 분열을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와 생각이, 성별이, 세대가, 출신 지역이 다르다고 서로 편을 가르고, 적으로 돌리는 이런 공동체에는 국민 모두가 주인인 민주주의, 더불어 살아가는 공화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며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위기”라고 말했다.
김 총리는 정치인과 공직자로 보낸 과거를 떠올리며 “힘에 부치고 좌절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왜 정치를 하고, 왜 공직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으로서 공직자로서의 삶은 결국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이 당연하고도 엄중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그의 지인들은 ‘김부겸 정치’를 “안분지족”으로 요약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로 성과를 거두는 정치를 일관되게 밟아왔기 때문”(이진수 전 보좌관)이다.
문재인 정부의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은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국정 마무리 △코로나19 관리 △국민통합이었다고 총리실 관계자는 전했다. 김 총리는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는 것으로 공식 일정을 시작해 지난 6일까지 모두 94차례 회의를 이끌었다. 이임사에서도 “지난 1년은, 우리 대한민국 공동체가 ‘코로나19’라는 큰 위기를 겪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고 돌아봤다. 앞서 지난 3일 열린 마지막 기자회견에서도 “코로나19가 델타(변이 바이러스)로 바뀔 때 치명률이 높아 다시 (방역을) 되돌릴 때가 제일 힘든 결정이었다”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코로나19로 죽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는다고 절규하듯 문자를 보냈다”며 아쉬워했다. 지난해 12월 중대본 회의에서 방역 조처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하던 김 총리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통합형’, ‘화합형’ 인사로 꼽힌다.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을 두고도 이견이 있을 때 추가경정예산안(추경) 규모를 조정하는 물밑 협상 중재도 그의 몫이었다. 총리실 관계자는 “민주당의 추가 지급 요구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반발하면 김 총리도 겉으로는 홍 부총리 편을 들면서도 홍 부총리를 설득해 추경 규모를 조정했다”고 말했다. 대화와 타협의 ‘의회주의자’였던 그는 지난 2월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국회가 뜻을 모아준다면 정부는 합리적 방안을 도출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국회에서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는데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않냐”며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손실 보상을 위해 정부의 추경 증액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또 다른 총리실 관계자는 “총리가 추경안에 대한 정부 입장만 전달하던 전례를 깬 이례적 발언”이라고 꼽았다.
김부겸 국무총리가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임식을 마친 뒤 청사를 출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역주의 타파’ 역시 ‘김부겸 정치’의 한 축을 이뤘다. 그는 1977년 대학 시절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고 1980년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간사로 활동하며 재야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거쳐 1991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며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였다. 2000년 16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 군포에서 당선된 뒤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안에 한나라당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같은 해 7월 이우재·이부영·안영근·김영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해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동참했지만 이후에도 ‘철새’라는 꼬리표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야 했다. 2012년부터 ‘지역주의 타파’를 목표로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 그는 티케이(TK·대구경북)라는 지역적 기반 때문에 민주당에서도 운신의 폭이 좁았고 대구에서도 민주당이라는 정치적 기반 때문에 고군분투해야 했다.
대구시민에게 건넨 명함이 찢기고 ‘빨갱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민주당에서 경상도 말하는 사람이 둘밖에 없었는데 (민주당에서는) 반대로 경상도 출신이 왜 기웃거리냐는 말을 안 들었겠냐’라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2012년 총선,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2016년 총선에선 대구 수성갑에서 62.03%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며 민주당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2020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그는 그해 8월 ‘싸우는 정치’가 아닌 ‘일하는 정치’를 하겠다며 전당대회에 출마했지만 이낙연 전 대표에게 패배했다. 약 9개월 뒤 그는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30년 넘게 해 왔던 정치인과 공직자 여정도 마무리하고자 한다”며 ‘정계 은퇴’ 의지를 재확인했다. 퇴임 뒤 거취와 관련해선 “우리 공동체가 더 어렵고 힘없는 이웃을 보살피고 연대와 협력의 정신으로 다음 세대의 미래를 열어주는 일에서, 저 역시 언제나,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도 “보호 종료 아동, 자립 준비 청년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와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온 이진수 전 보좌관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치인 출신 총리들은 (퇴임 뒤 정치 행보를 고려해) 도랑 치고 가재를 잡으려고 하지만 김 총리는 곁눈질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며 “‘정계 은퇴’ 뜻을 시사했던 김 총리의 행보와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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