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선 투표일 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이전에 올린 짧은 공약 문구를 이어붙여 올렸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오늘이 며칠이지? 수요일인가? 아, 벌써 금요일이라고?”
202203××. 파일명.hwp를 적을 때 컴퓨터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날짜를 꼭 다시 보고 적는다. 시간감이 없어진 지 오래, 여기는 D-○○일만 존재하는 유니버스, 대통령선거 한복판이다.
‘1일 100돌발’, 싸우다 합 맞으면 끝나는
보좌진은 정당인이기도 하므로 국회의원선거는 물론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등 각종 선거에 파견된다. 이런 선거 시기 국회에서 특별한 법 통과를 위한 입법노동자가 아닌 선거사무원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선거캠프에는 이겨야 할 상대가 명확하고 기간은 한정된 싸움이 가지는 특유의 활기와 무질서함이 있다. 국회에서는 어느 직급이면 대략 어떤 업무를 맡는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캠프는 국회뿐 아니라 직능단체, 시민사회, 전문가 집단 등 곳곳에서 파견 오기 때문에 경력과 나이 모든 게 뒤엉킨다. 이 때문에 캠프 안에서 갈등과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내내 싸우다가 합이 맞아떨어지면 그때 선거가 끝난다’는 말은 선거캠프의 오래된 경구(?)이다. 우리 팀은 특히 루틴이라는 게 없어서 우리끼리는 ‘1일 1돌발’이 아니라 ‘1일 100돌발’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회에 있을 때는 배포하는 보도자료, 만드는 법안, 써내는 연설문에 대한 반응이 어느 정도 예측된다. 설령 예측 범위를 넘어가 상대 당에서 공격을 세게 하든 비판적 보도가 나오든 대응할 준비와 자원이 이미 있다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갖고 일 한다.
그런데 선거는, 특히 대통령선거는 얘기가 다르다. 각 당에는 상대 당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전담 상황대응팀이 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대변인단과 특보단이 있어서 각 건에 대한 이슈를 확증하는 스피커 구실을 한다. 그러니 손톱만 한 실수도 그다음 날 TV 정치시사프로에서 온종일 ‘먹잇감’이 되는 일이 허다하다. 나는 10여 년 보좌관 생활을 해도 여전히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보내기’ 버튼을 클릭할 때 심장이 쫄깃한데, 선거대책위원회에서는 내가 검증하고, 우리 팀의 동료가 검증하고, 우리는 이미 외울 지경이 되어버려 다른 팀 동료까지 끌어와 검증의 검증을 해도 최선과 최악의 경우의 수를 상상적으로 셈하며 자료를 배포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나. 온종일 전화와 회의를 하고 밤까지 새워 까슬해진 채로 밥을 넘길 때 ‘현실 자각 타임’이 온다. 우리가 세운 전략부터 시작해서 제일 마무리 단계인 홍보물까지 요소요소마다 마음을 담는 건 이 선거가 우리 사회를 고쳐 쓰는 계기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2022년 한국 사회, 우리는 처음으로 시대의 유산 없는 선거를 치렀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각각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으로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만들었다. 유산에 기댄 선거는 앞선 세대의 정신과 말과 글의 복기로 기본 얼개가 갖춰질 것이다. 그런데 시대의 유산이 없다는 것은, 각 진영이 이제 진짜 국정운영 실력으로 진검승부를 해야 한다는 의미고, 지금부터 만들어내는 말과 글이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는 의미다. 철저하게 갈렸던 양 진영이 둘 다 ‘공정’을 외치는 것은 역설적으로 진영화된 시대정신이 해체됐다는 의미다. 과거와 같은 거대담론이 휘발됐으니 미시담론과 네거티브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선거가 되었다. 그래서 공약 만들 때 앞 세대의 말과 생각을 옮겨 적는 대신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로 현세대와 다음 세대의 쓰임새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됐다. 회고 대신 전망이, 당위 대신 쓸모가 자리잡았다. 그러니 이 선거에 진심이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선 후보 정책이 담긴 공보물 발송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연합뉴스
대통령선거 중반, 단 일곱 글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쟁적이긴 하지만 부처 개편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폐지는 너무 갑작스럽다보니 왜 폐지하는 건지 후속 대처는 어떻게 할 건지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캠프 관계자들은 제대로 답하기는커녕 응답하는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달랐다. 처음엔 후속이 예정된 티저광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였고 심지어 메시지의 후속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 캠프 후보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했으며, 이어진 TV토론에선 추가적인 해명과 사과의 요구에 “그거 대답하는 데 시간을 쓰기 싫다”고 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형식과 태도에 맥이 확 풀렸다. 공약 설명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은 공약의 △목표 △이행방법 △이행기간 △재원조달방안을 습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괜한 것이 아니라 그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각 캠프에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공약 작성 서식이다. 선관위는 각 후보자에게 공약을 국민에게 설명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해 그 내용으로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절차를 두고 있다.
이 자료 하나 써내려면 이제껏 만들었던 법안과 정책을 모두 검토하고 재원까지 산출해야 하므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 선대위 회의에서 공약 리스트에 넣고 빼기를 수차례 한다. 선관위에 공식적으로 제출하는 것은 10대 공약뿐이지만, 각 캠프는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의 공약을 담은 정책공약집을 발간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정책을 만드는 담당자들은 작은 공약 하나에도 발표됐을 때의 추가 질의, 언론 인터뷰, 그리고 실제 당선돼서 정부 정책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한 재원조달 마련 방안까지 반드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공약 설명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후속 질의에도 시간을 쓰지 않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후보자의 직무를 저버린 것이다. 정치의 기원이 투쟁인 이상, 정치 전략은 갈등의 조장·이용·억압을 다룰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갈등은 1987년 이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구분과 이념 갈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에 보수세력이 찾아낸 새로운 정치적 균열이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젠더 갈등이라는 새로운 전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성과 남성을 갈라치기 하는 전략은 정당정치의 근본적인 속성의 발로라는 맥락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유권자에게 심판받겠다며 나온 후보들이라면 최소한 공약 설명에 대한 책임은 이행해야 하지 않겠나. 현존하는 여성가족부가 무슨 문제가 있길래 폐지해야 한다는 것인지, 폐지하면 수많은 여성정책과 가족정책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인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면 성별 임금격차 같은 객관적 데이터가 잘못됐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데이터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인지? 깜짝쇼로 만들어버린 부처 폐지 공약, 현존하는 성차별에 대해 시간조차 쓰고 싶지 않다는 태도는 성차별 사회에서 고통받는 국민을 주권자는커녕 소비자로도 보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그건 갈등 조장 이상의 정책폭력이다.
서두에 시대의 유산 없이 처음 치러지는 선거이니 지금부터 만들어내는 말과 글이 새로운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새롭게 도래할 시대에 대한 인식을 겨루고, 전망을 겨루고, 의지를 겨뤄서 제대로 평가받고 싶다. 농담과 무책임을 겨루고 싶지 않다. 누가 됐든 옛것에 기대 회고적으로 복기하는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2022년 3월10일 새벽 4시30분, 윤석열 ‘당선 확실’ 표시를 텔레비전 개표방송에서 보고 사무실을 나섰다. 새벽 공기가 추울 것 같아 옷을 잔뜩 여몄는데 견딜 만해서 의아했다. 모르는 새 봄이 다가와 있었나보다. 늘 옛 정치의 반복을 비판하며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표현했는데, 바뀐 계절에 맞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건 나였나보다. 바뀐 바람의 방향과 공기의 온도를 다시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걷는다.
‘D-○○일’과 ‘캠프’ 같은 전장의 언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복귀해야 하는 시점이다.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 갈등 구도도 이제 통합을 위해 새로이 재편해야 할 시점이다. 바뀐 행정부의 관점과 철학에 따라 다시 새로운 갈등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 갈등하되, 배제와 혐오는 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이 위임해준 권한을 가진 국민의 대리인 자격으로 앞으로 국민의 몫과 자리가 어떻게 배분되는지, 혹여나 다시 또 비국민이 만들어지지는 않는지 선거 때 가졌던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아 성실하게 견제하고 감시해야겠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