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8일 국민의힘이 공개한 윤석열 대선 후보의 장보기 사진.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멸치’ ‘#콩’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멸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제공
☞뉴스레터 공짜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올해 1월 초, 때아닌 ‘멸공’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들썩였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저 ‘때아닌’이라는 말이라는 것도 때아닌 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정치 후진국 시절 북풍, 색깔론 등 온갖 추한 형태의 정치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종북’보다도 오래된 멸공이라는 말이 지금 정치인들의 입에 올려지는 일 자체가 불쾌한 기시감이 들게 만드는 것일 테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나 저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단어를 전혀 접하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멸공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정부 여당 공격의 레토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간단한 단어 하나에 여당 인사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왠지 미운 상대의 아픈 곳을 한대 더 때리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을 테다.
멸공 논란을 쏘아 올렸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공개사과를 하면서 짧은 소동이 일단락된 형국에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당연히 뒷북치는 일이다. 여기서는 뒷북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고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로 #멸치와 #콩을 쓰는 해시태그 릴레이 혹은 챌린지가 왜 길게 이어지지 못했는가에 관한 생각이다.
인간은 들을 수 없고 개들만 들을 수 있는 음역대의 고주파음을 내는 호루라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개를 훈련시키거나 개의 집중을 끌어야 할 때 쓰는 물건이다. 이 개 호각(dog whistle)은 오늘날 정치 커뮤니케이션 논의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용어다. 개만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논란이 따를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무난한 메시지에 매우 위험한 메시지를 교묘히 약호화하여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을 가리켜 개 호각이라고 한다. 특정 집단에게 ‘개 호각을 분다’(dog whistles to)라는 말처럼 동사형으로 쓰기도 한다.
개호루라기 효과를 내던 ‘멸콩 챌린지’는 공개 캠페인 전환 뒤, 소리 없이 그 효능을 잃었다. 각 인스타그램 갈무리
개 호각의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그가 입양한 반려견 ‘플로키’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런데 하필 견종이 시바견이다. 시바견은 머스크 자신이 ‘아버지’를 자처했던 암호화폐 ‘도지코인’의 상징이다.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머스크가 올린 사진은 단지 한 마리 귀여운 개일 뿐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요동치는 암호화폐 가격에 전전긍긍하는 투자자들이 보기에 머스크가 올린 개 사진은 그 자체로 긴급 동원명령이 되어버린다. 난데없이 ‘플로키’ 화폐도 출시하는 등, 머스크가 올리는 메시지에 어떤 코드가 숨어 있는지, 수많은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촌극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 밖에 가장 교과서적인 사례로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있다. 이 직관적인 구호는 일견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단순한 메시지로 보인다. 하지만 방점이 ‘다시’에 찍혀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위대하지 않다, 그럼 누구 때문에 위대하지 않게 된 것인가? 최근 들어 물밀듯 들어온 이민자들 때문일 것이다’라는 추론을 유도한다. 적어도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들만큼은 개만 들을 수 있는 호각처럼 저 코드화된 메시지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숨은 메시지를 포착한 사람들끼리 유대감을 키운다.
정용진 부회장이 소셜미디어에 뜬금없이 멸공을 거론한 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신세계 이마트에서 조림용 멸치를 카트에 담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 ‘#달걀 #파 #멸치 #콩’을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에 대해 정용진 부회장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더불어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색깔론 공세를,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채 비겁한 방식으로 획책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윤석열 후보는 당연하게도, 멸치 육수랑 콩국을 해 먹으려고 산 것뿐이라고 해명하며 선을 그었다.
정용진 부회장이 쏘아 올리고 윤석열 후보가 본격화한 멸공 해시태그 릴레이는 어쩌면 훨씬 더 지구력이 있는 유행이 될 수도 있었다. 과장을 보태자면 2020년대 한국의 새로운 ‘십자가 밟기’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장 볼 때 으레 사는 멸치와 콩 사진을 올린 뒤 첫 글자인 ‘#멸콩’을 적는다.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해시태그를 알아본 사람이 ‘아, 이 사람도 나와 같구나’라는 반가움을 안고 해시태그 릴레이에 동참한다. 그렇게 소셜미디어에 #멸콩을 게시한 사람들 간에 유대감이 발생한다. 한편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마트에서 산 것들 올렸을 뿐’이라고 하며 상대를 옹졸한 사람, 제 발 저린 도둑과 같은 사람으로 몰 수 있다. 이에 대처하기란 굉장히 까다롭다. 이 유행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된 이후부터는, 릴레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분위기마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 우파 네티즌들 사이에서 거대한 유행으로 번질 수 있었던 릴레이에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내부로부터 나왔다. 나경원 전 의원이 ‘신나라’ 하며 본인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 릴레이를 이으며 ‘멸공! 자유!’를 적었고, 김진태 전 의원이 다 함께 멸공 캠페인을 벌이자고 쓴 것이다. ‘멸콩’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를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면 개만 들을 수 있었던 호각은 기능을 멈추고 그냥 소음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해시태그에 언짢게 반응하는 사람을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게 되어 재미가 반감된다. 시쳇말로 ‘짜치게’ 되었다. 두 전 의원이 눈치 없이 나댄 덕분에 극히 위험할 수 있었던 유행이 빠르게 식어버렸다.
미디어문화 연구자. 첫 책 <프로보커터>에서 극단적 도발자들의 ‘나쁜 관종’ 현상을 분석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