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천 의원(왼쪽)과 성일종 의원. 누리집 갈무리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자 전두환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로 정권을 집어삼켰습니다. 광주는 무릎을 꿇지 않고 저항했습니다. 신군부는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5·18 광주’에 큰 빚을 졌습니다.
5월 18일은 5·18 민주화 운동 41주년입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립니다. 정부 차원의 공식 행사입니다.
하루 전인 5월 17일에는 5·18민주유공자 유족회 주관으로 5·18 민중항쟁 추모제가 열립니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참가자를 99명으로 제한했습니다.
그 99명에 국민의힘 정운천 의원(비례대표)과 성일종 의원(충남 서산·태안)이 포함됐습니다. 유족회가 두 국회의원을 초청한 것입니다.
유족회가 민정당 이후 국민의힘까지 이른바 보수 정당 국회의원을 5·18 추모제에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2004년 추모제에 정의화 한나라당 의원이 참석하는 등 전례가 있었지만, 유족회 초청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유족회는 왜 정운천 성일종 의원을 콕 집어서 초청한 것일까요?
시작은 2020년 8월 19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광주 무릎 사과’였습니다. 국민의힘은 김종인 위원장의 광주 방문 이후 후속 조처로 국민통합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정운천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정운천 위원장은 국민의힘 국회의원 50여명으로 ‘호남동행의원단’을 구성했습니다. 동행의원단은 5·18 단체 간담회, 지방자치단체별 현안 및 예산 간담회, 영·호남 공동추진사업 발굴, 지역 현안 관련 법률 개정에 나섰습니다. 정운천 위원장은 지금까지 5·18 단체와 17차례에 걸쳐 간담회를 했다고 합니다.
성일종 의원은 그동안 국회 정무위원회 국민의힘 간사를 맡고 있었습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국가보훈처 소관 상임위원회입니다. 5·18 관련 법안을 심의합니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를 비롯한 5·18 단체는 국가보훈처 소속 공법단체 승격을 희망했습니다. 성일종 의원을 찾아가서 설득했습니다. 상임위원회에서 야당 간사가 반대하면 법안 통과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남이 계속되면서 성일종 의원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국회는 지난해 12월 본회의에서 5·18 관련 3개 단체를 국가보훈처 소속 공법단체로 승격하는 5·18 민주 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27일에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5·18 희생자 직계가 아닌 형제·자매들에게도 5·18 유족회 회원 자격을 주도록 하는 법률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5·18 유족회 회원 300명 가운데 24%를 차지하는 형제·자매들도 공법단체 참여가 가능해집니다.
김영훈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에게 정운천 성일종 의원을 추모제에 초청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다.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당이지만 정운천 의원과 성일종 의원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처음에는 좀 소극적이었는데 나중에는 여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더라. 정운천 의원은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호남 지역과 자매결연을 하도록 했다. 성일종 의원은 내가 20번 넘게 찾아가서 14번을 만났다. 두 의원에게 5월 단체가 다 감사하고 있다. 광주 정서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여야를 떠나서 화합 차원에서 두 의원을 추모제에 초청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김영훈 회장의 구수한 사투리만큼이나 따뜻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5·18 광주’는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보수 정당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아니, 싫어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 신군부가 만든 정당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남을 고립시키고 지역갈등을 부추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분단 기득권 세력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보수 정당 후보들이 호남에서 얻은 득표율이 얼마나 될까요? 놀라울 정도로 적습니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후보
광주 4.81% 전남 8.16% 전북 14.13%
1992년 김영삼 민자당 후보
광주 2.13% 전남 4.20% 전북 5.67%
1997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광주 1.71% 전남 3.19% 전북 4.54%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광주 3.57% 전남 4.62% 전북 6.19%
2007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광주 8.59% 전남 9.22% 전북 9.04%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광주 7.76% 전남 10.00% 전북 13.22%
2017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광주 1.55% 전남 2.45% 전북 3.34%
역대 보수 정권이 다 호남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켰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호남이 이른바 보수 정당에 대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 책임이 보수 정당 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망언’ 사건은 자유한국당 시절인 2019년 2월 8일에 터졌습니다. 김진태·이종명 의원이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 공청회’를 공동주최했습니다. 이종명 의원은 “80년 광주 폭동이 10년, 20년 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민주화 운동이 됐다. 다시 뒤집을 때”라고 했습니다.
김순례 의원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진태 의원은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영상 메시지로 “5·18 문제에 대해선 우파가 밀려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 당시 세 의원의 발언 내용을 듣고 말 그대로 경악했습니다. 정치인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세 의원에 대한 징계를 흐지부지했습니다.
▶5·18 망언과 징계 쇼···YS의 진노가 두렵지 아니한가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882439.html
그 뒤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황교안 대표가 성균관대 앞 떡볶이집을 방문해 5·18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을 했습니다. “1980년, 그때 뭐 하여튼 무슨 사태가 있었죠? 1980년. 학교가 휴교 되고 뭐 이랬던 기억도 나고 그러네요”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나시지요?
그랬던 자유한국당, 그랬던 미래통합당의 국회의원들이 5·18 유족회의 초청을 받아 추모식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당사자인 정운천 의원과 성일종 의원도 무척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성일종 의원이 지난 14일 아예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보도자료에는 두 의원의 인사가 들어 있습니다.
“5‧18 민중항쟁 제41주년 추모제에 초청을 해주신 김영훈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오월 영령들께서 남기신 뜻을 이어받아 5‧18 정신을 국민 대통합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정운천)
“과거 우리 국민의힘이 5·18 민주유공자와 유족분들에 대한 예우에 소홀했던 면이 있었으나, 이제는 우리 당도 많이 반성하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5·18 민주유공자와 유족분들의 민주화 정신을 계승해 새 시대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됐다.”(성일종)
국민의힘과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이 이처럼 5·18과 호남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로 돌아선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일시적인 제스처일까요, 근본적 변화일까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해 8월 19일 광주 무릎 사과를 했을 때만 해도 “정치적 이벤트일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김종인 위원장은 올 3월 24일 광주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5·18 단체와 간담회를 했습니다.
그 뒤 원내대표로 선출된 김기현 당 대표 권한대행이 첫 번째 지역 일정으로 5월 7일 광주를 찾았습니다. 김기현 권한대행은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아픈 역사를 잘 치유하고, 민주 영령들의 뜻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역사의 책임”이라며 “앞으로 국민의힘은 동서통합을 넘어 대한민국의 통합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수진·박형수 의원 등 국민의힘 초선 의원 9명과 김재섭·천하람 당협위원장도 5월 10일 광주에 왔습니다.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옛 전남도청,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방문했습니다.
국민의힘 초선 국회의원들과 당협위원장들이 5월 10일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종인 위원장이 시작한 ‘국민의힘 호남동행 프로젝트’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6월 11일 선출되는 국민의힘 새 지도부도 이런 흐름을 잘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정치 집단이나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힘과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이 앞으로도 계속 5·18과 광주를 자기 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5·18을 모욕하고 호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국민의힘 주위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정치가 발전하는 방향이고, 동시에 국민의힘이 집권 가능한 대안 정당으로 진화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