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월 4일 대검찰청 청사 앞에서 검찰총장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박정희 이후 거의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호남 출신은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충청도 출신은 없었다.
충청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다 해 먹고 우리는 뭐냐”라는 피해 의식이 있다. 선거에 나서는 정치인들은 이런 정서를 절묘하게 파고든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이 우리 충청도를 핫바지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전시장, 충남지사, 충북지사를 자민련이 싹쓸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 화가 난 충청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대전 7석 전부, 충남 13석 가운데 12석, 충북 8석 가운데 5석을 차지했다. ‘제이피’는 역시 노회했다.
김종필 총재가 ‘충청권 맹주’는 차지했는지 몰라도, 결국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그 뒤 안희정, 이완구, 정운찬, 반기문 등 충청도 출신 정치인들이 대통령 꿈을 꿨지만 실패했다. 이번에는 윤석열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61)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충청권에서 인기가 높다. 왜 그럴까?
그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90)는 어릴 때 충남 공주와 논산에서 살았다. 공주농고를 나왔다. 논산시 노성면, 그리고 노성면 옆의 공주시 탄천면 일대에는 지금도 파평 윤씨들이 많이 산다.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61) 지역구는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이다. 정진석 의원이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공주에서 선거운동을 하며 ‘공주 출신 윤석열 손발 자른 검찰 대학살, 국민은 분노한다’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 막 등장하던 시점이다.
정진석 의원의 모친은 파평 윤씨 윤증의 직계후손이다.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윤증 고택이 정진석 의원의 외가인 셈이다.
정진석 의원의 경쟁 상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박수현 전 의원이었다. 정진석 의원이 윤석열 총장을 끌어들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공주 출신 윤석열 검찰총장을 구박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 대변인을 한 박수현 후보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성공한 셈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총선 당시부터 그 지역 파평 윤씨들 사이에서는 “윤석열 총장을 다음 대통령 만들기 위해서 정진석 의원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 이후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는 상승세를 탔다. 특히 충청권에서 좋았다.
2021년 1월 리얼미터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적으로는 이재명 23.4%, 윤석열 18.4%, 이낙연 13.6%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대전·세종·충청은 달랐다. 윤석열 24.7%, 이재명 21.7%, 이낙연 13.9%였다. 대구·경북도 윤석열 22.8%, 이재명 16.2%, 이낙연 7.1%였다.
대구·경북에서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가 높은 것은 그가 문재인 정부에 맞서는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라고 응답자들이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권에서 높은 이유는 뭘까? ‘충청 대망론’ 이외의 다른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2021년 2월 리얼미터 조사에서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는 15.5%로 떨어졌다. 특히 충청권 지지도가 12.2%로 반 토막이 났다. 기대감이 낮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 느닷없이 총장직을 사퇴한 이유가 혹시 고향에서 대선 주자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은 아닐까? ‘충청 대망론’이 살아 있다면 앞으로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석열 전 총장 지지도가 다시 올라갈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 대검 청사 앞에서 검찰총장 사퇴 의사를 밝힌 직후 정진석 의원이 페이스북에 ‘윤석열과 함께, 문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싸우겠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나와 우리 국민의힘은 문 정권의 폭정을 심판하겠다는 윤석열에게 주저 없이 힘을 보태려고 한다.”
정진석 의원은 4·7 재·보선 뒤 열릴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출마할 예정이다. ‘윤석열을 앞세워 정권을 교체하자’고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윤석열 전 총장은 대통령이 될 것인가. ‘충청 대망론’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