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소중한 절차입니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갖습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국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로 선출합니다. 지방의회 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주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로 선출합니다.
여론조사는 사회 대중의 공통 의견을 조사하는 일입니다. 민심을 살피는 참고 자료에 불과합니다.
선거와 여론조사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여론조사에 목을 맵니다. 자신의 인지도와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론조사 결과를 조작하는 등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 때문입니다. 여론조사 수치가 높게 나오는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그 결과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커집니다. 유권자의 지지를 실제로 많이 받아서 여론조사에서 높은 수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높은 수치가 거꾸로 실제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효과입니다.
최근 4·7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티브이 조선>이 서던포스트알앤씨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를, 서울시장은 지난 3일 저녁, 부산시장은 지난 4일 저녁 각각 보도했습니다. 주요 후보 가상대결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서울시장>
박영선 34.9%, 나경원 21.5%, 안철수 27.9%
박영선 34.2%, 오세훈 19.6%, 안철수 28.5%
박영선 37.7%, 안철수 40.9%
박영선 40.1%, 나경원 35.8%
박영선 41.4%, 오세훈 33.4%
<부산시장>
김영춘 31.4%, 박형준 40.8%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숫자의 마력이 있습니다. 누가 앞서 있다고 말로 하는 것과 이처럼 숫자로 보여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론조사의 이런 숫자를 접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가서 실제 선거에서 후보들이 얻게 될 득표율을 미리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여론조사에는 두 가지 결정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째, 표본오차입니다.
예를 들어 ‘표본오차가 95% 신뢰 수준에 ±3.0%포인트’라면 같은 조사를 100번 했을 때 95번은 오차가 ±3.0%포인트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두 정치인의 지지도 격차가 6.0%포인트 이내라면 누가 앞섰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국갤럽은 누리집에 ‘표본오차 무시한 여론조사 맹신(盲信)’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경고의 글을 띄워놓고 있습니다.
만약 신(神)이 있다면, 신만이 실제 여론이 어디쯤 있는지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알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했기에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어렴풋이나마 여론의 실체를 가늠할 뿐입니다. 우리는 바깥의 작은 새가 드리운 그림자를 무서운 괴물로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대통령 직무 긍정률 50%'라는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 중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의 비율이 정확하게 50%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1,000명 표본조사 결과라면, '95% 신뢰 수준에서 표본오차 ±3%포인트'라는 문구를 동반합니다. 이는 '대통령 직무 긍정률이 50%±3%포인트, 즉 47~53% 범위 안에 들 확률이 95%'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실제 직무 긍정률이 그 범위를 벗어날 확률이 5%에 불과하므로 47~53% 범위 안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미입니다.
표본조사 결과를 수치가 아닌 범위로 본다면, 우리의 해석 방식은 좀 달라져야 합니다. 대통령 직무 긍정률이 지난주 대비 1%포인트 상승한 것은 어디까지나 표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 전체 국민의 여론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범위 안에 있다고 추정할 따름입니다.
표본오차 범위 내의 변동은 표본에서의 현상이며, 전체 국민의 여론이 바뀐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표본은 동굴 속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통해 실체를 추측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사는 여론조사 결과에 근거한 기사를 쓰면서 표본오차를 무시하고 ‘순위 매기기’를 합니다. 어느 정치인이 단 1%포인트라도 앞서면 그냥 “앞섰다”고 보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경마식 보도가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하기 때문입니다.
<티브이 조선> 여론조사에서 서울시장 양자 가상대결을 예로 들겠습니다. ‘박영선 37.7% 대 안철수 40.9%’나, ‘박영선 40.1% 대 나경원 35.8%’라면 누가 확실히 앞섰다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격차가 표본오차 이내이기 때문입니다. ‘박영선 41.4% 대 오세훈 33.4%’는 ‘박영선 우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격차가 표본오차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둘째, 작위성입니다.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에서는 가상대결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상대결에 어느 후보를 포함할 것인지는 보통 여론조사를 의뢰하는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이 협의해서 임의로 결정합니다. 문항 숫자를 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당내 경선을 앞둔 유력 정당의 후보들이 가상대결에서 빠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번 <티브이 조선> 서울시장 가상대결 조사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의원, 국민의힘 오신환 전 의원, 조은희 서초구청장이 빠졌습니다. 부산시장 가상대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박인영 부산시의원, 변성완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 국민의힘의 박민식 전 의원, 박성훈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이언주 전 의원이 빠졌습니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인물만 보고 투표하지 않습니다. 정당과 인물을 함께 보고 투표합니다. 따라서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의원, 국민의힘 오신환 전 의원과 조은희 서초구청장을 서울시장 가상대결에 포함했다면 상당한 지지도를 보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산시장 가상대결에 더불어민주당의 박인영 부산시의원, 변성완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 국민의힘의 박민식 전 의원, 박성훈 전 경제부시장, 이언주 전 의원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경쟁력을 보였을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본격적인 경선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론조사 가상대결에서 빠진 후보자들은 벌써 존재감이 희미해지면서 당내 경선에서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시사저널>이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서 2월 2일과 3일 조사한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가상대결 지지도를 ‘윤석열 42.0% 대 이재명 39.5%’, ‘윤석열 40.5% 대 이낙연 31.7%’라고 보도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야권의 유일한 대선후보로 출마한다는 가정에 따라 한 여론조사입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그런데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말 야권의 대선후보로 나설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총장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정리한 뒤, 윤석열 총장이 대선후보로 나설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정가의 상식입니다.
만약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나 홍준표 의원을 야권의 유일한 대선후보로 넣고 가상대결 여론조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황교안 전 대표나 홍준표 의원도 꽤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재집권을 바라지 않는 유권자들이 황교안 전 대표나 홍준표 의원을 지지한다고 응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을 상대로 대선 후보 가상대결을 하면 유명 연예인 지지가 더 높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정치를 싫어하는 유권자는 유명 연예인을 지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상대결 여론조사는 “누가 어느 당 후보로 출마한다면”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조사이기 때문에 늘 위험한 측면이 있습니다.
표본오차 범위를 무시하고 함부로 순위를 매기거나, 가상대결 후보자를 임의로 선정하는 것은 주로 언론사에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여론조사에 관한 한 언론사보다 훨씬 더 문제가 심각한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정당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선거는 선거권자의 소중한 권리 행사입니다. 여론조사는 민심을 알아보기 위한 참고 자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당이 여론조사를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당심’이 아니라 ‘민심’을 반영하기 위해서라고 명분을 내세웁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사실은 당내 경선을 선거인단 방식으로 제대로 치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거인단을 모집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음과 비용을 감당할 역량이 우리 정당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가운데)이 1월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4·7 재보궐선거 공관위 2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양석 사무총장, 정 위원장, 정점식 당 법률자문위원장. 연합뉴스
여론조사 경선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심하게 말하면 공직 후보자 선출을 그냥 도박에 맡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문제도 많습니다.
첫째, 후보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지도가 높은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셋째, 따라서 유능한 신인 발굴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론조사 경선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당장 국민의힘은 이번 4·7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를 100% 여론조사로 선출합니다. 더불어민주당도 여론조사를 50% 반영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지난해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후보자가 당원이나 지지자들을 직접 접촉할 기회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조사 경선은 정치인의 ‘실체’보다 ‘이미지’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상황을 점점 더 가속할 수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여론조사 경선은 반드시 폐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대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치가 풀어야 하는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