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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 사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이유는 뭘까

등록 2021-01-10 10:32수정 2021-01-10 11:38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59
“장난치냐” “시중 잡범이냐” 적반하장 반응 여론 악화
‘반대 54%’-‘찬성 37%’ 큰 격차···무당층 ‘50% 대 38%’
민주당 지지층 75% 반대···국민의힘 지지층 70% 찬성
사면 찬반 논쟁은 경선-대선 국면까지 끊이지 않을 듯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20년 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러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오른쪽). 사진공동취재단, 김정효 <한겨레>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20년 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러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오른쪽). 사진공동취재단, 김정효 <한겨레> 기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1일 꺼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론은 반대 여론이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갤럽이 1월8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는 ‘현 정부에서 사면해선 안 된다’는 응답이 54%, ‘현 정부에서 사면해야 한다’는 응답이 37%였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는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75%가 사면에 반대했고 찬성은 18%에 그쳤습니다. 반면에 국민의힘 지지층은 70%가 사면에 찬성했고 반대는 22%였습니다.

지지 정당에 따라 이 정도로 첨예하게 찬반이 엇갈리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반대 여론이 훨씬 많은 결과가 나타난 것은 무당층이 반대 50%, 찬성 38%로 기울었기 때문입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온 노태우(왼쪽)·전두환 전 대통령. &lt;한겨레&gt; 자료사진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온 노태우(왼쪽)·전두환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두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한 여론이 이처럼 좋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이 여론을 악화시킨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낙연 대표의 사면 건의 언급 뒤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반대 의견이 강하게 나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나 당원, 지지자들이 곧바로 사면에 찬성했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일요일인 1월3일 긴급하게 비공개 최고위원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낙연 대표는 “국민과 당원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당사자 반성이 중요하다”며 물러섰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은 처음부터 이낙연 대표 혼자 힘으로 일거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보수 세력에서는 일단 이낙연 대표의 진정성과 용기를 평가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여권에서 누구도 꺼내기 어려운 의제를 이낙연 대표가 수면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4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면은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으로 단행할 일이다. 세상의 이치는 양지가 금방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된다.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다고 칼자루를 잡고 있다고 사면을 정략적으로 활용하거나 사면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 전쟁에서 항복한 장수, 항장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대우는 있다. 정치적인 재판에서 두 분 다 억울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사건에서 사과나 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면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주호영 원내대표의 발언은 각 언론에 “장난치지 말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이재오 전 의원은 4일 <시비에스>(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재오 : 반성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두 대통령이잖아요, 전직. 그런데 대통령 입장에서는 반성을 하려면 잡아간 사람이 반성해야지 잡혀간 사람이 무슨 반성을 하냐. 아니, 내줄 사람이 그동안에 오래 고생했으니까 미안하다고 하고 내주면 몰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너 잘못했다 해라 그러면 내보내 주겠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 진행자 : 그런데 반성과 사과를 해야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이 되고 공감대가 형성돼야 대통령도 사면권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이재오 : 그것은 시중 잡범들이나 하는 이야기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국민의 공감이라는 게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지 않습니까? 찬성을 택하느냐, 반대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사면권자의 정치적 결단인 거고, 반성의 여부라고 하는 것은 무슨 당사자들 입장에서 이거는 사면을 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사면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도 생각해야 되잖아요.

당사자들은 지금 그동안의 2년, 3년 걸쳐서 감옥 산 것만 해도 억울한데, 억울한 정치보복으로 잡혀갔는데 지금 내주려면 곱게 내주는 거지 무슨 소리냐 이렇게 하는 것은 사면을 받을 당사자들 입장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면은 사면을 해주는 사람의 의지와 사면을 받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게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루어야지, 사면하는 사람이 내가 칼자루를 잡았다고 너 반성해라, 사과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역대 어떤 정권도 그런 적은 없었죠.
이재오 전 의원의 발언도 각 언론에 “시중 잡범이냐”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달려서 주요 뉴스로 보도됐습니다.

주호영 원내대표나 이재오 전 의원이 하고 싶은 말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국민에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나는 억울하다” “정치 보복당했다” “장난치지 말아라” “내가 시중 잡범이냐” “잡아간 사람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라고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보수 신문들도 여론을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습니다.

이낙연 대표가 새해 언론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언급한 뒤 <조선일보> 1월2일 치 사설 제목은 ‘전직 대통령 사면, 정치 계산 버리고 인도적 차원서 결단해야’였습니다. 이틀 뒤인 4일 치 사설 제목은 ‘제동 걸린 전 대통령 사면, 드러난 친문본색’이었습니다.

정치적 부담은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알아서 하고, 두 전직 대통령은 무조건 사면하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양심불량(良心不良)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라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론이 지금처럼 나빠진 상태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논쟁은 이제 끝난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1월14일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이 확정된다면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가 다시 관심사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 이후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문재인 대통령 새해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당연히 사면에 대해 질문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답변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뭐라고 답변하든 그 뒤로도 사면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3·1절 특사가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8·15 광복절 특사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9월 초로 예상되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나 11월 초로 예상되는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서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가 또다시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선 국면에서도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는 앞으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에서 전직 대통령 처벌과 사면 논쟁은 왜 반복되는 것일까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처벌이 ‘정당한 사법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후임 정권의 정치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과 사면 때도 그랬습니다. 벌써 20년이 훨씬 더 지난 일이니 나이가 드신 분들도 아마 기억이 가물가물하실 것입니다.

1995년 10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5·18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 및 반란 혐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사형,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을 선고했습니다. 두 사람은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확정판결을 내렸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저는 2001년 <디제이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라는 책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디제이)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가장 먼저 한 정치적 결정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달라고 현직 대통령인 와이에스(김영삼)에게 건의한 것이었다. 아니 당시의 역학관계로 보아 디제이가 사면을 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 이틀 뒤인 1997년 12월20일 청와대 2층 백악실에서 와이에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디제이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고, 와이에스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디제이는 “이제 지역갈등, 계층갈등을 넘어서는 국민통합을 통해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해야 한다. 잘못된 정치는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디제이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졌다.(중략)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은 실제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자신들의 석방에 유리한지 면밀하게 계산을 해서 감옥 밖으로 메시지를 내보낸 흔적이 있다. 1997년 12월18일 선거 당시 국민회의 서대문을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상현씨는 나중에 전두환씨의 가족이 기호 2번(김대중 후보)을 찍은 것을 선거 참관인이 ‘훔쳐보고’ 자기에게 이야기를 해준 일이 있다고 밝혔다.(중략)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주자들은 두 사람에 대한 사면 문제를 들고 나왔다. 디제이는 97년 5월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국민과 함께 용서할 수 있다”고 ‘선수’를 치고 나왔다. 이런 과감한 제의는 디제이 자신이 바로 1980년 신군부 쿠데타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회창씨도 당초 부정적인 입장에서 9월에는 사면 쪽으로 선회해 와이에스에게 추석 전 조기 사면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와이에스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회창씨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2010년 출판한 <김대중 자서전>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노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은 반발이 거셀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 것이니, 평소 내가 설파했던 ‘용서론’을 실천하기로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복권은 앞으로 더 이상의 정치보복이나 지역적 대립은 없어야 한다는 내 염원을 담은 상징적 조치였다.

한때는 신군부 세력에 대한 증오심이 전신을 휘감기도 하고, 그들의 만행이 꿈속까지 휘젓고 나타났지만 그래도 용서하기로 했다. 나는 영국의 민주화 밑을 흐르는 ‘용서의 정치’를 떠올렸다.

영국은 1649년 청교도혁명 때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그러나 그 같은 정적에 대한 보복은 혼란과 내분을 가져왔다. 그 결과 크롬웰이라는 더 지독한 독재자가 출현했다. 그 후 영국 국민들은 1688년 명예혁명 때는 찰스 1세의 왕권지상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그의 둘째 아들 제임스 2세를 축출할 때 그가 프랑스로 도망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에 머물며 망명정부를 세우고 그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쳐 왕권을 수복하겠다고 영국 정부를 괴롭혔다. 영국 정부는 그러한 사태를 예상했지만 그들을 살려 두었다. 정치보복으로 입게 될 정치적·사회적 후유증에 비하면 오히려 그편이 낫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영국이 관용과 질서 속에서 의회 정치의 꽃을 피운 것은 그 밑바탕에 이 같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의 국외 탈출을 막고 처형한 프랑스나,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모조리 처형한 러시아의 혁명과 비교해 보면 영국의 결단은 현명하고 위대했다. 영국은 이러한 관용의 축복을 300년간 누렸고, 이에 따라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번영을 유지해 왔다. 나는 이러한 영국인들의 용서와 화해를 떠올리며, 진정 힘들었지만 우선 저들을 용서했다.

전·노 전 대통령은 22일 풀려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석방 소감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관록을 갖추고 믿음직한 김대중 당선자가 당선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은 신군부 쿠데타의 피해자인 자신의 용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같은 사건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혀 다르게 기록했으니 말입니다.

라쇼몽(羅生門)이라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는데 당사자 네 사람이 각자의 입장에서 전혀 다르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록을 읽으며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2001년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나는 이날 김대중 당선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두환·노태우와 12·12 및 5·18 관련자들을 사면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이제 구속된 지 만 2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는 석방할 생각을 갖고 있었고, 또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미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모든 검토를 마친 상태였다. 시기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계획대로 추진할 생각이었다.(중략)

선거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19일 오전 10시 나는 예정대로 김종구 법무장관으로부터 최종 보고를 받았다. 다음날인 12월20일에는 이를 김대중씨에게 알려주었고 22일 국무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김대중씨는 전두환·노태우 등을 사면하겠다는 내 말에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좋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했다. 사면복권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고 당선자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2017년 전두환 회고록

대법원이 4월17일 일부 원심을 파기하고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1996년 3월 시작된 5·18 특별법에 의한 재판이 1년 1개월 만에 모두 종결되었다. 그러자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기다렸다는 듯이 각 종파를 막론한 종교계와 일부 지역에서 나에 대한 사면 청원운동이 본격화되었다고 했다.(중략)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 전부터 그리고 최종 판결이 나오자마자 사면 얘기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유죄라고 판단한 법원의 결정,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를 매장시키기 위한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애초부터 부당하거나 무리한 조치였다는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중략)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건 나의 사면 문제는 김영삼 현직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의중에 달려 있다고들 했다. 사면권이 대통령의 고유의 권한이기는 하지만,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를 초래해 나라를 파산 상태에 빠뜨린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는 나를 사면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안 된다고 고집할 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나에 대한 사면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졌고, 당선이 확정 발표된 바로 다음 날인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의 회동을 거쳐 오후 2시30분 나와 노태우 등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발표되었다. 나의 사면과 복권을 위한 300만명의 청원이 청와대에 전달된 지 5개월 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사면’이 철저히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종교계를 비롯한 300만명 사면 청원 때문에 사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요? 언젠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이 이뤄진다면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낙연 대표가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를 들고나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몇몇 언론에서 분석했듯이 차기 대선주자로서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낙연 대표는 본래 통합론자입니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정치하면서도 내내 그랬습니다. 분열을 싫어하고 통합을 추구했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2003년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라는 책을 냈습니다. 자신의 칼럼을 모은 2장의 첫 번째 글은 ‘신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2003년 5월2일 <영광 21>에 썼던 글입니다.

어떤 신당을 만들 것인가. 저는 5개항의 원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당의 몇 분 지도자들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것으로 압니다.

첫째는 세대통합의 원칙입니다. 특정 연령층만이 주도하거나 중심이 되는 정당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노년 장년 청년층이 조화를 이루는 정당이어야 합니다. 남녀의 조화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둘째는 이념통합의 원칙입니다. 진보나 보수의 어느 한 편에만 치우치는 정당은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정당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진취적인, 약간은 진보적인 정당이었으면 합니다. 개혁적이되 안정적 개혁을 지향하는 정당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지역통합의 원칙입니다.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전국정당이어야 합니다. 특정 지역에 편중돼서도 안 되지만, 특정 지역을 배제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호남 문제는 한국 정치의 숙명적 현실입니다. 호남이 왈가왈부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온당치 않습니다.

넷째는 민주당 계승의 원칙입니다. 민주당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계승해야 합니다. 민주당의 이념과 철학을 이어가면서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민주당의 인적 자원도 최대한 포용해야 합니다. 민주당은 한국 정치의 위대한 결실이며 자산입니다.

다섯째는 덧셈의 원칙입니다. 뺄셈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치인이 정치인을 심사하겠다는 것은 오만이며 월권입니다. 심판은 국민들께 맡겨져 있습니다. 신당은 문호를 열어놓고 뜻을 같이하려는 분들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섯 가지 원칙이 모두 다 ‘통합’인 셈입니다. 이낙연 대표는 이념적인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의 정책 노선을 굳이 따지면 중도나 중도 보수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념이나 정책 노선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태도’에서도 지나침을 경계하는 정치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낙연 대표의 이런 면모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1년 뒤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헌신과, 우리가 가진 좋은 가치들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거리를 두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 가치를 통해 우리가 보듬고자 하는 분들까지도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것인지 통렬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근본주의적 사고가 우리를 경직되게 하고 폭을 좁히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낙연 의원은 지난 대선의 패인을 이렇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민주주의, 인권, 복지 같은 진보적 가치를 충분히 중시하지만, 막말이나 거친 태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접근을 싫어하는 성향을 ‘태도 보수’라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태도 보수’의 유탄을 맞지는 않았을까.”

‘태도 보수’란 말이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 아니지만, 핵심을 찌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념, 정책,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태도’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입니다. 2021년 새해를 맞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론을 꺼낸 것이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낙연 대표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낙연 대표가 자신의 본래 정체성인 ‘통합’의 가치를 정면에 내세우고 바야흐로 ‘이낙연류’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인은 정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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