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30
7·3 인사 메시지는 남북관계 개선한다는 확고한 의지
한반도 라인 개편···박지원 국정원장 발탁이 화룡점정
옛 ‘정적’도 필요하면 발탁하는 문재인 대통령 용인술
7·3 인사 메시지는 남북관계 개선한다는 확고한 의지
한반도 라인 개편···박지원 국정원장 발탁이 화룡점정
옛 ‘정적’도 필요하면 발탁하는 문재인 대통령 용인술
박지원 의원이 5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오피스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북이 남과 정상 회담을 원했다. 그런 징후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포착되었다. 임동원 국정원장과 박지원 문광부 장관은 북의 움직임을 수시로 보고했다. 그러던 2월 어느 날, 임 원장이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했다.
“북측이 송호경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 부위원장을 대표로 정해 놓고 싱가포르에서 접촉을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2월 27일 임 원장과 박 장관을 청와대 관저로 불렀다. 유럽 4개국 순방을 앞둔 시점이었다.
“북이 싱가포르에서 비밀 접촉을 갖자고 했습니다. 박 장관을 특사로 임명할 것입니다. 북에서도 박 장관을 원한답니다. 국정원에서는 대북 협상 전문가를 뽑아서 지원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임 원장께서 남북 회담과 관련해 특별히 나를 보좌해 줘야 할 것입니다.”
박 장관이 특사로는 대북 담당 부서인 통일부 장관이 더 적임일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통일부 장관은 노출이 되어 어렵습니다. 이번 접촉은 보안이 생명입니다. 박 장관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일은 임 원장과 상의해서 처리하십시오.”
임 원장이 김보현과 서훈 두 대북 전문가를 발탁했다고 보고했다. 나는 박 장관에게 내가 평양을 갈 용의가 있다는 것과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면 남북 경협이 훨씬 용이하게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리라고 했다. 그리고 북쪽 사람들을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되 당당하라고 일렀다.
2000년 3월 8일, 싱가포르에서 박지원 장관이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과 비밀 접촉을 가졌다. 그 다음 날 나는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박 장관에게 후일 들었지만 북측은 남측 최고 당국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박 장관은 나의 민주화 투쟁과 그로 인한 박해 등을 얘기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주장했던 4대국 평화 보장론, 3단계 통일론 등을 설명하고 팩스로 미리 받은 ‘베를린 선언’도 보여 주었다. 물론 ‘베를린 선언’은 결코 비밀 접촉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지 않았다. 박 장관은 5월 또는 6월에 정상 회담 개최를 희망하고, 내가 평양에 갈 수 있다는 것 등을 전했다.
송호경 부위원장은 이번 예비 접촉은 일체 비밀로 하자고 했고, 그로써 남과 북의 탐색이 끝났다. 비밀 접촉에서 남과 북은 서로 정상 회담에 대한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시 만나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었다. 박 장관이 돌아와 보고했다.
“송호경 부위원장이 제 설명을 듣고는 ‘마치 김대중 대통령의 음성을 듣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정상 회담이 성사될 것 같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나는 계속 두고 보자며 박 장관을 격려했다.
싱가포르 예비 접촉에 이어 1차 특사 접촉이 3월 17일 상하이에서 있었다. 이번에도 박지원, 송호경 두 사람이 만났다. 나는 박 장관에게 회담에서 유념할 것들을 적시했다.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마시오. 북측에 설명할 때는 손익 개념으로 명확하게 얘기하십시오. 이를테면 전쟁을 하면 북에 어떤 손해가 오고, 전쟁을 안 하면 어떤 이익이 오는지 말하시오. 경제 협력하면, 또 평화 교류하면 어떤 이익이 오는지 손에 딱 쥐여 주시오.”
그리고 만일 합의문을 작성하게 되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을 얘기해 주었다.
“합의문에는 세 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이 초청해야 하고, 둘째 정상 회담은 김정일 위원장과 해야 하고, 셋째 반드시 우리 초청에도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하이 접촉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박 장관이 돌아와 보고했다.
“정상 회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데 구체적인 것은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초청 주최, 정상 회담 시기와 일정, 정상 회담 후 합의문 등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아직 ‘뒤편’에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문했다.
“모든 것을 명확히 하시오.”
3월 23일 베이징에서 2차 특사 접촉이 있었다. 때는 봄날, 나는 제비가 박씨를 물고 돌아오듯 박 장관이 좋은 소식을 물고 오기를 기다렸다. 남과 북은 정상 회담을 향해 조금씩 다가앉았다. 우리 측은 정상 회담을 6월 12~14일에 개최하고 초청자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명확히 할 것을 다시 제의했다. 이에 북은 시기는 6월 중순으로 합의하되 준비 회담에서 최종 결정하자고 했다. 하지만 초청자 명기 문제는 진전이 없었다. 정상 회담은 김정일 위원장이 하겠지만 북측의 외교 관례상 합의서에 위원장을 명기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2차 회담이 끝났다. 나는 회담 결과를 보고받고 박 장관에게 지시했다.
“그간의 협상 태도를 보니 북이 변하는 것 같은데 합의문에 반드시 초청자를 명기토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도 포함시키도록 하시오.”
3차 접촉은 4월 8일 베이징에서 있었다. 북에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미 베이징에서 북과 접촉하고 있는 실무진들은 큰 틀의 타협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떠나기 전 박 장관이 보고했다.
“이번에는 합의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합의문을 명확하게 만드시오. 기대가 큽니다.”
박 장관이 마침내 박씨를 물고 나타났다. 이른바 남과 북의 ‘4·8 합의문’이 그것이었다.
남과 북은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 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된다. 쌍방은 가까운 4월 중에 절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준비 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북한은 합의문을 4월 10일에 발표하자고 했다. 우리는 보안 유지가 어려우니 9일 베이징 현지에서 발표하자고 했다. 그러나 북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 4월 15일인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제’가 10일 시작하니 이때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북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남북 정상 회담이 합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복받쳤다. 2년 동안 지속해 온 햇볕 정책이 북의 의심을 마침내 녹였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햇볕 정책을 흔들림 없이 지지해 준 국민들 성원의 힘이었다.
‘필생의 통일 철학을 마침내 실현하는 기회를 맞는구나.’
통일은 당장 이루지 못해도 한반도에서 전쟁의 먹구름은 벗겨 내야겠다고, 또 이산가족 문제는 꼭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지난 1개월 동안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된 남북 접촉 상황을 미국과 일본에 알렸다. 임동원 원장을 보내 미·일 대사에 설명하도록 했다. 보스워스 미국 대사는 박지원 장관에게 추가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박 장관에게 특별히 일렀다.
“자세히, 숨소리 하나 빠뜨리지 말고 알려 주시오.”
4월 10일 오전 10시, 박재규 통일부 장관과 박지원 문광부 장관이 남북 정상 회담 합의를 발표했다. 북한도 같은 시간에 발표했다.
특검은 사정없이 진행되었다. 은행, 기업, 정부의 관련자들을 모두 불러 샅샅이 조사했다. 민감한 문제들이 돌출되어 당사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끝내 국민의 정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통일의 일꾼들이었다. 사건은 ‘현대 비자금 의혹’으로 번졌다. 박지원 전 실장이 현대로부터 150억 원을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훗날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로 드러났다. 또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정몽헌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대북송금 특검은 이렇듯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나는 이를 지켜보며 아프고 또 아팠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통합의 조건으로 햇볕정책과 호남 지역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박지원 의원, 호남 중진과 당을 같이 못 하겠다는 얘긴데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당을 같이 못 할 사이가 됐는지 이유는?
“상당히 유능하고 좋은 분이다. 저는 정치하면서 저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은 강한 보수, 여러 가지 장점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냐. 박근혜 비서실장이다. 척을 졌지만, 용기 있게 싸웠나, 그건 아니지 않나. 그분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강한 투쟁을 했다고 하면 차라리 최순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을까. 그 책임이 있다. 그런데 대구에 가서, 대구에서 못 벗어나는 분이다. 그런 분이 자기의 대북정책, 강경 보수 입장 지키면서 남에게는 햇볕정책 내려놔라. 자기는 대구 지키면서 호남을 버리라고 한다. 이건 준비 안 된 분의 이야기지 지나친 욕심이라고 본다. 저는 민주세력 반드시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위해서 분단국가에서 통일 지향하는데 남북 교류 협력 포용, 햇볕정책이 계승 발전돼야 한다. 저는 호남이 낙후돼있기에 호남 발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세 가지 정치적 목적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라도 일탈한다고 하면 저는 (같이) 할 수 없다”
-북한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으니까 햇볕정책은 이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지?
”그러니까 햇볕정책이 더 필요한 것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미사일을 쏴대는데 그럼 전쟁을 해야 하나? 다 죽자는 것이냐? 이럴 때일수록 한미동맹 속에서 튼튼한 안보 다지고 북한과 대화해서 해결해야지, 선제공격한다고 되나. 지금 할 수 있는 건 햇볕정책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디제이(DJ)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하고, 북한에 대화 제의하는 건 아주 잘하는 정책이다.”
-안철수 대표가 대선 때 햇볕정책에도 공과가 있다고 양비론을 폈는데 동의하나?
“그때 저는 동의한다고 했다. 햇볕정책이라고 지고 지선 한 건 아니다. 대선 때니까 넘어갔다. 그런데 제가 기분 나쁜 것은 이것이다. 제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초대 평양 대사를 하고 싶다. 입에 달고 살았는데. (대선 때 토론회에서) 그 질문이 나오니까 (안 대표가) ‘농담으로 했다’고 답변했다. 어떻게 당 대표가 한 말을 농담으로 몰아버리는가 섭섭했지만, 그때야 대선 후보 중심이니…”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밀사로 북한 측과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그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정일에게 뒷돈 4억5000만 달러를 건네는 역할을 맡았다. 그 지원으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위기를 넘기고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해 6년 뒤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박 내정자는 노무현 정권 시절 특검 수사를 받고 수감됐다.
박 전 의원을 국정원장에 내정한 데 대해 청와대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며 북한에 대한 전문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박 전 의원은 대북송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단돈 1달러도 보낸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현대 측에 대북송금을 요청하고 4억5000만 달러 불법 송금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 2004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인물이 국가 안보와 기밀정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적임인지 논란이 예상된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메인 스트림들은 박 장관이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는 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밉기는 하지만 특별히 자기들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정국의 흐름에 별 영향을 줄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장관이 밀사로 베이징에 다녀와서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설정해놓은 ‘마지노선’을 넘어선 것이다. 박 장관이 한빛은행 사건에 연루돼 문광부 장관직을 사퇴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박 장관이 국정원장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을 논평으로 내면서 김 대통령과 박 장관을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다. 소문을 논평으로 낸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박 장관에게 ‘칼’을 쥐여주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했다.
서훈 전 국정원장 임명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 현장. <한겨레> 자료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5월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정치 지형의 변화:한국과 G2' 정책세미나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자료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7월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북전단과 볼턴의 충격, 대북정책 어디로 가야 하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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