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23
문희상 의장 40년 정치 인생 마무리
그가 염원하던 화이부동 무신불립은 요원한데···
“개혁은 반대 세력과 대화하면서
원칙을 관철하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 필요”
문희상 의장 40년 정치 인생 마무리
그가 염원하던 화이부동 무신불립은 요원한데···
“개혁은 반대 세력과 대화하면서
원칙을 관철하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 필요”
문희상 국회의장(왼쪽)과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저녁 국회의장 공관 뜰에서 대화하며 웃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다. 21대 국회는 꼭 협치해야 한다. 그리고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게 기억이 남는다.”
“국태민안과 국리민복이 중요한데 이를 잊고 서로 싸우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정치의 본질은 통합과 조정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강조해서 말씀하시니 새겨졌다.”
“정치를 구성하는 병(안보), 식(경제), 신(신뢰·명분)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첫 번째는 병, 그럼 식과 신 중에서 포기해야 한다면 식,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신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울림이 있었다.”
“사실 퇴임 뒤에는 40평짜리 단층집에서 10평짜리 꽃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쌈을 좋아하니까 쌈을 계속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 그런데 그게 이뤄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별의별 사람들이 찾아와서 뭘 하자고 한다. 자신이 없다.”
참으로 오랜만에 언론인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 문희상입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 제목 앞에는 퇴임이라는 말이 더 붙어있습니다. 기어이 이날이 오고야 마는군요. 임기가 꼭 8일 남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언론인 여러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몹시 떨립니다. 국회의장직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 자체였던 국회와 정치를 떠난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늘 그렇듯이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는 설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를 앞두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무엇이 나를 정치로 이끌었나, 그리고 문희상의 정치는 무엇이었나 곱씹고 곱씹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평생을 정치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65년 혈기 넘치던 법대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던 시기를 떠올리면 55년의 세월입니다. 80년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하면 40년입니다. 87년 제2의 서울의 봄, 처음으로 정당에 참여한 시절을 기준으로 해도 33년이 됩니다.
평생의 업이자 신념이었던 정치를 떠난다니 사실 심정이 복잡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께서 말씀하셨던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나날이었습니다. 흔히 쓰는 말로 ‘말짱 도루묵’ 인생이 아니었나 하는 깊은 회한이 밀려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쉬움은 남아도 나의 정치 인생은 후회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쌓아 올린 보람이 가득했던, 행복한 정치인의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희상의 결정적인 첫걸음은 1979년 시작됐습니다.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처음 만난 날, 그 모습이 지금도 강렬하고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통일에의 꿈이 무지개처럼 솟아오르는 세상” 그 말씀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습니다. 그날 모든 것을 걸고 이뤄야 할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대통령님이 당선되었습니다.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현실이 되었고, 이로써 저의 목표는 모두 다 이뤄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날 이후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부터 내 인생은 덤이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덤치고는 너무 후한 정치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부름을 받았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회의장을 하며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야당이었던 두 정부에서는 야당을 대표하여 한국사회에 미력하나마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무려 다섯 정부에서 제게 역할이 주어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언론인 여러분!
1980년 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무참히 사라졌지만, 젊은 문희상이 품었던 꿈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저의 정치는 ‘팍스 코리아나’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팍스 코리아나’의 시대를 만들고 싶은 당찬 포부였습니다. 80년대 당시에는 그저 정치 초년생의 꿈이었을 뿐 누구도 실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에 기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습니다. 국민의 힘과 한국사회의 역량은 강화되어 어떠한 국난도 능히 극복해내는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으며 팝과 영화, 스포츠와 방역에 이르기까지 K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서진(西進)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에서 대영제국 팍스 브리태니커로,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팍스 아시아나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팍스 아시아나의 시대에는 한국·중국·일본 3국 서로 양보하며 협력 속의 경쟁이 필연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팍스 코리아나의 꿈을 실현하고 우뚝 서기를 저는 염원합니다.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라면 누구나 꿈꾸고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떠나도 문희상의 꿈, 팍스 코리아나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6선의 국회의원이지만, 두 번의 낙선도 경험했습니다. 낙선을 포함해 수많은 위기의 순간과 시련의 시간도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실의에 빠져있던 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은 고향 의정부 시민의 손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변함없는 사랑 덕분에 6선의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명예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와 고마움을 어찌 잊겠습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제가 나고 자라서 뼈를 묻을 고향 의정부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고단했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우리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이후 각종 개혁 작업에 주력했지만, 국민으로부터 만족할만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세력이 개혁의 어젠다를 독식했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 도취해 국민을 설득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아집과 독선에 빠진 점이 있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 고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는 합리적인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중도적이거나 온건한 보수층을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가서 개혁 진영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국민의 40%에 해당하는 중도세력을 반개혁 진영에 넘기면 개혁의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개혁과 혁명을 혼동하고 있는 점입니다. 혁명은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쾌도난마처럼 원칙을 강요할 수 있지만, 개혁은 반대 세력과 대화하면서 원칙을 관철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17대 국회가 혁명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혁명적 역할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 국회’가 아니라 ‘혁명적 국회’가 돼야 한다는 것은 혁명을 하듯이 전방위적인 개혁을 하더라도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치가와 사상가’, ‘정치가와 정객’은 다른 것입니다.
사상가는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만 있으면 되고, 정객은 상인적 현실감각만 갖추면 되지만 정치가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공유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고,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도입니다. 생각이 다른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정치, 그것이 민주정치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로섬의 정치’는 더 이상 국민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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