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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봉숭아 학당’의 마지막 수업

등록 2020-05-24 10:29수정 2020-05-24 10:52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23
문희상 의장 40년 정치 인생 마무리
그가 염원하던 화이부동 무신불립은 요원한데···
“개혁은 반대 세력과 대화하면서
원칙을 관철하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 필요”
문희상 국회의장(왼쪽)과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저녁 국회의장 공관 뜰에서 대화하며 웃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문희상 국회의장(왼쪽)과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저녁 국회의장 공관 뜰에서 대화하며 웃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제가 문희상 국회의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초 한겨레에서 정치부 기자로 발령받았을 때였습니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낙선하고 정계 은퇴한 상태에서 이기택 총재가 민주당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문희상 의원은 초선 국회의원으로 이기택 총재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동교동계에서 이기택 총재를 돕기 위해 문희상 의원을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을 대변인으로 ‘파견’했다고 말할 정도로 야당은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사나 의원회관의 문희상 의원 사무실에는 야당 출입 기자들이 자주 모여 취재도 하고 정국에 대해 토론도 했습니다. 기자들은 문희상 의원과의 간담회를 ‘봉숭아 학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봉숭아 학당’은 당시 개그 프로그램 인기 코너 이름이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통합의 정치인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과 무신불립(無信不立)이 그의 정치 철학입니다.

화이부동은 논어의 자로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이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화목할 수 있는 군자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무신불립은 논어 안연편에 나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런 정치 철학을 모두 현장에서 체득했습니다.

문희상 의장은 1945년생입니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이른바 해방둥이입니다. 그의 부친은 철도직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두 차례나 지낸 ‘박정희맨’이었습니다. 아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 노선을 함께 하겠다고 했을 때 아들을 다시 안 보겠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부친은 1992년 아들의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돕고 곧바로 돌아가셨습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문희상 의장은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아버지, 제가 옳았죠”라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문희상 의장은 김대중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과 국정원 기조실장, 노무현 정부 초대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습니다. 14·16·17·18·19·20대 6선 국회의원으로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입니다.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성공한 셈이지만 이른바 ‘대권 욕심’이 없고 무리를 짓는 체질도 아니어서 대선 후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문희상 국회의장이 오는 5월 29일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끝으로 정치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정치인이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치인은 선거에서 패배하거나 공천을 받지 못해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초선 의원 시절을 취재했던 기자로서 그의 퇴장하는 모습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습니다.

문희상 의장은 5월 20일 21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특강을 했습니다. 현역에서 물러나는 정치 원로와 새로 시작하는 정치 신인들의 만남이 이채로웠습니다. 특강이 끝난 뒤 당선자 몇 사람에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다. 21대 국회는 꼭 협치해야 한다. 그리고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게 기억이 남는다.”

“국태민안과 국리민복이 중요한데 이를 잊고 서로 싸우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정치의 본질은 통합과 조정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강조해서 말씀하시니 새겨졌다.”

“정치를 구성하는 병(안보), 식(경제), 신(신뢰·명분)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첫 번째는 병, 그럼 식과 신 중에서 포기해야 한다면 식,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신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울림이 있었다.”

문희상 의장은 5월 20일 오후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5월 21일 오전에는 국회 사랑재에서 한 시간 동안 퇴임 기자 간담회를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얘기도 했고 개헌 얘기도 했습니다. 기자 간담회의 중요한 내용은 여러 언론에서 기사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문희상 의장의 간담회 스타일이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매우 솔직하고 장황하게 답변을 한 것입니다.

어느 기자가 “회사 선배들에게 문희상 의장의 봉숭아 학당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 퇴임 기자 간담회를 보니 비로소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마지막 질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날 아침 <한겨레> 문화부 남지은 기자가 쓴 개그맨 임하룡 씨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임하룡 씨는 문희상 의장의 ‘봉숭아 학당’ 시절 진짜 ‘봉숭아 학당’의 선생님 배역을 맡았던 개그맨입니다. 1952년생이니까 지금 68세입니다. 그런 그가 다음 달 ‘브로드웨이 42번가’ 뮤지컬 무대에 다시 선다는 기사였습니다.

문희상 의장의 모두 발언에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는 설렘”이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거론하며 퇴임 이후에 임하룡 씨처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문희상 의장이 “그건 그냥 뻥을 좀 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좌중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사실 퇴임 뒤에는 40평짜리 단층집에서 10평짜리 꽃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쌈을 좋아하니까 쌈을 계속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 그런데 그게 이뤄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별의별 사람들이 찾아와서 뭘 하자고 한다. 자신이 없다.”

문희상 의장다운 솔직하고 소박한 답변이었습니다. 기자들과의 문답에 앞서 문희상 의장이 ‘인사 말씀’을 했습니다. 퇴임하는 정치인의 상투적인 인사가 아니라 그의 삶을 압축한듯한 인상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봉숭아 학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종례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길지 않으니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편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언론인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 문희상입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 제목 앞에는 퇴임이라는 말이 더 붙어있습니다. 기어이 이날이 오고야 마는군요. 임기가 꼭 8일 남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언론인 여러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몹시 떨립니다. 국회의장직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 자체였던 국회와 정치를 떠난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늘 그렇듯이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는 설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를 앞두고 지난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무엇이 나를 정치로 이끌었나, 그리고 문희상의 정치는 무엇이었나 곱씹고 곱씹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평생을 정치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65년 혈기 넘치던 법대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던 시기를 떠올리면 55년의 세월입니다. 80년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하면 40년입니다. 87년 제2의 서울의 봄, 처음으로 정당에 참여한 시절을 기준으로 해도 33년이 됩니다.

평생의 업이자 신념이었던 정치를 떠난다니 사실 심정이 복잡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께서 말씀하셨던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나날이었습니다. 흔히 쓰는 말로 ‘말짱 도루묵’ 인생이 아니었나 하는 깊은 회한이 밀려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쉬움은 남아도 나의 정치 인생은 후회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쌓아 올린 보람이 가득했던, 행복한 정치인의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희상의 결정적인 첫걸음은 1979년 시작됐습니다.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처음 만난 날, 그 모습이 지금도 강렬하고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통일에의 꿈이 무지개처럼 솟아오르는 세상” 그 말씀이 저를 정치로 이끌었습니다. 그날 모든 것을 걸고 이뤄야 할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대통령님이 당선되었습니다.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현실이 되었고, 이로써 저의 목표는 모두 다 이뤄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날 이후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부터 내 인생은 덤이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덤치고는 너무 후한 정치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부름을 받았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국회의장을 하며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야당이었던 두 정부에서는 야당을 대표하여 한국사회에 미력하나마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무려 다섯 정부에서 제게 역할이 주어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언론인 여러분!

1980년 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무참히 사라졌지만, 젊은 문희상이 품었던 꿈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저의 정치는 ‘팍스 코리아나’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팍스 코리아나’의 시대를 만들고 싶은 당찬 포부였습니다. 80년대 당시에는 그저 정치 초년생의 꿈이었을 뿐 누구도 실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에 기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습니다. 국민의 힘과 한국사회의 역량은 강화되어 어떠한 국난도 능히 극복해내는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으며 팝과 영화, 스포츠와 방역에 이르기까지 K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서진(西進)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에서 대영제국 팍스 브리태니커로,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팍스 아시아나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팍스 아시아나의 시대에는 한국·중국·일본 3국 서로 양보하며 협력 속의 경쟁이 필연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팍스 코리아나의 꿈을 실현하고 우뚝 서기를 저는 염원합니다.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라면 누구나 꿈꾸고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떠나도 문희상의 꿈, 팍스 코리아나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6선의 국회의원이지만, 두 번의 낙선도 경험했습니다. 낙선을 포함해 수많은 위기의 순간과 시련의 시간도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실의에 빠져있던 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은 고향 의정부 시민의 손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변함없는 사랑 덕분에 6선의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명예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와 고마움을 어찌 잊겠습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제가 나고 자라서 뼈를 묻을 고향 의정부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고단했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어떻습니까? 문희상 국회의장의 퇴임을 아쉬워하며 축하해 준 사람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21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 김명수 대법원장, 유남석 헌재소장, 정세균 국무총리, 권순일 선관위원장이 부부 동반으로 만찬을 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퇴임과 금혼식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명록에 “무신불립 화이부동의 정신으로 걸어온 40년 축하드립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문희상 의장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취재하다가 오래전 글을 하나 찾았습니다. 문희상 의장은 2005년부터 정치에 대한 생각을 그때그때 써서 ‘희망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누리집에 올리고 있습니다. 161호까지 썼습니다.

희망통신 1호는 2005년 1월 1일 ‘강개부사이 종용취의난’(慷慨赴死易 從容就義難)이라는 어려운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해 나아가 죽기는 쉬우나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지만, 고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글을 읽다가 문희상 의장이 지금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에게 주는 ‘맞춤형 조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하며 이번 정치 막전막후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이후 각종 개혁 작업에 주력했지만, 국민으로부터 만족할만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세력이 개혁의 어젠다를 독식했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 도취해 국민을 설득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아집과 독선에 빠진 점이 있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 고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는 합리적인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중도적이거나 온건한 보수층을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가서 개혁 진영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국민의 40%에 해당하는 중도세력을 반개혁 진영에 넘기면 개혁의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개혁과 혁명을 혼동하고 있는 점입니다. 혁명은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쾌도난마처럼 원칙을 강요할 수 있지만, 개혁은 반대 세력과 대화하면서 원칙을 관철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17대 국회가 혁명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혁명적 역할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 국회’가 아니라 ‘혁명적 국회’가 돼야 한다는 것은 혁명을 하듯이 전방위적인 개혁을 하더라도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치가와 사상가’, ‘정치가와 정객’은 다른 것입니다.

사상가는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만 있으면 되고, 정객은 상인적 현실감각만 갖추면 되지만 정치가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공유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고,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도입니다. 생각이 다른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정치, 그것이 민주정치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로섬의 정치’는 더 이상 국민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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