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의원이 지난해 11월 12일 ‘열린 토론, 미래’ 세미나에 참석해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면 의안정보시스템이 있습니다. 20대 국회로 기간을 설정하고 검색창에 ‘헌법개정안’이라고 치면 두 개의 의안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26일 발의한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입니다. 또 하나는 ‘강창일 의원 등 148인’이 2020년 3월 6일 발의한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입니다. 심사 진행 상태는 두 개 모두 본회의에 계류 중입니다. ‘본회의 부의 안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은 2018년 5월 24일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야당 의원들이 투표에 불참하는 바람에 ‘투표 불성립’ 처리됐습니다. 20대 국회가 임기를 마치면 폐기됩니다.
강창일 의원 등 148인이 발의한 개헌안은 뭘까요? 최근 몇몇 언론의 보도로 내용이 알려졌습니다.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총선에서 승리한 거대 여당이 21대 국회에서 추진할 개헌의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해 강창일 의원 등이 발의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 한다”고 비판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두 신문은 5월 1일 치와 2일 치 신문에 사설까지 썼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강창일 개헌안’의 실체부터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퍼지고 각 정당의 4·15 총선 공천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3월 6일 밤 9시 국회 본회의가 열렸습니다. 총선을 치르기 위해 국회의원 지역구를 조정한 선거법 개정안과 그동안 밀린 여러 법안을 처리하기 위한 본회의였습니다.
본회의에 상정된 의안은 모두 162개였습니다.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 법률안과 정치자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161번째, 162번째 의안이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본회의 개의를 선언하면서 “보고 사항은 회의록에 게재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날 밤 본회의는 처리 의안이 너무 많아서 밤 12시를 넘겼습니다. 157번째 의안 ‘공항소음 방지 및 소음대책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대안)’을 처리하고 본회의를 일단 산회한 뒤, 차수를 변경해 158번째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 촉구 결의안’부터 마지막 의안까지 처리했습니다.
강창일 의원 등 148인의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은 문희상 국회의장이 “회의록에 게재토록 하겠다”고 한 ‘보고 사항’이었습니다. 3월 6일 치 국회 본회의 회의록에 실려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헌법 128조가 규정한 개헌 발의 요건에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인 이상’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현행 헌법은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개헌안은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나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인 이상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고 바꾸자는 것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간단해도 어쨌든 개헌안입니다. 148명이면 300명의 과반이 안 되는 숫자인데 어떻게 개헌안이 발의됐을까요?
공직선거법은 지역구 국회의원 결원이 발생해도 재보선일부터 임기만료일까지 기간이 1년 미만이면 선거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비례대표는 임기만료일 전 120일 이내에 궐원이 생긴 때에는 의석을 승계할 사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개헌안이 발의된 3월 6일 국회 재적의원은 295명이었습니다. 148명은 국회 재적의원 295명의 과반을 가까스로 넘긴 숫자입니다. 참고로 2020년 5월 3일 현재 국회 재적의원은 290명입니다.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발의로 개헌이 제안됐다는 사실은 이틀 뒤에 공개됐습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대한민국 헌정회,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25개 단체가 모인 ‘국민 발안 개헌 연대’가 3월 8일 국회 기자실에서 “개헌안이 발의됐다”고 회견을 한 것입니다.
개헌이 발의되면 그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될까요?
대통령이 20일 이상 공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개헌안이 공고된 날부터 60일 안에 의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국회 의결은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합니다. 국회 의결을 통과하면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합니다.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 헌법 개정은 확정됩니다. 국민투표를 통과한 개헌안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습니다. 헌법은 “대통령은 즉시 이를 공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강창일 의원 등 148인의 개헌안은 ‘공고’ 절차를 밟았을까요? 밟았습니다. 개헌안은 3월 11일 치 관보 별권에 ‘대통령 공고 제299호’로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 공고
대한민국 헌법 제128조 제1항에 따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제안된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을 대한민국 헌법 제129조에 따라 다음과 같이 공고합니다.
대통령 문재인
2020년 3월 11일
헌법은 “국회는 헌법개정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하여야 하며, 국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60일 이내 의결 조항을 둔 이유는 “헌법 개정이라는 주요한 이슈가 장기화되어 헌정의 불안정성을 초래하거나 국론 분열로 나아가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입니다.(성낙인, 2017 ‘헌법학’)
따라서 국회는 강창일 의원 등 148인의 개헌안을 늦어도 5월 9일까지는 의결해야 합니다.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으면 통과되는 것이고, 얻지 못하면 부결되는 것입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나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5월 8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개헌안을 표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헌법이 정한 절차대로 개헌안을 처리하겠다는 원칙적인 의사를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5월 9일 시한이 끝나기 전에 가결이든 부결이든 결론을 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5월 8일 국회 본회의 의사일정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5월 8일 새로 선출되는 미래통합당 원내 지도부가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총선 참패와 김종인 비대위원장 영입 진통으로 궁지에 몰린 심재철 원내대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재철 원내대표의 진짜 의도는 본회의 의사일정 거부가 아니라 개헌 거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국민 발안 개헌안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국민 발안 개헌안은 헌정 자체를 뒤집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민주노총을 동원해 ‘노동자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국민 발안 개헌이 가능해지면 민주노총이 100만명을 동원해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강화하는 개헌안을 발의하고 21대 국회에서 180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야당 의원들을 포섭해서 민주노총 개헌안을 의결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가요?
대한민국에서 100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단체가 민주노총뿐인가요?
더불어민주당이 미래통합당 의원들을 끌어들여 개헌선 200석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설사 국회에서 여권 주도로 개헌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그런 개헌안이 과연 국민투표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심재철 원내대표의 주장은 도대체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기이한 것은 ‘강창일 등 148인’의 의원 중에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 의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의자 148명 중에서 미래통합당이나 미래한국당 의원들을 찾아봤습니다.
홍일표 유민봉 박명재 김용태 이혜훈 강석호 김성태 김무성 여상규 정운천
백승주 이종배 이종구 안상수 장석춘 정병국 정진석 김학용 정갑윤 이명수
20명이 있었습니다. 다른 언론에서는 22명이라고 보도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삼화 김수민 전 의원은 개헌안을 발의했지만,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민생당을 탈당하는 바람에 의원직을 잃었습니다.
어쨌든 놀라운 것은 국민 발안 개헌안 발의에 동참한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 의원 20명이 대부분 정치적 거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당 대표, 김성태 정진석 의원은 원내대표, 정갑윤 의원은 국회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여상규 법사위원장도 빠뜨릴 수 없겠네요.
심재철 원내대표의 주장대로 국민 발안 개헌안이 민주노총을 동원해 노동자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면 이른바 보수 정당의 이런 거물들이 국민 발안 개헌안 발의에 동참한 이유가 뭘까요? 이 사람들이 친노동자 성향의 정치인들인가요? 아니면 시민단체와 민주노총의 술책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한 정치인들인가요?
국민 발안 개헌은 본래 우리나라 헌법에 있던 제도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없애버렸습니다.
[헌법 개정 절차 변화]
1948년 헌법
제안 :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3분지 1 이상 찬성
의결 : 국회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찬성
1952년 헌법
제안 : 대통령, 민의원 재적의원 3분지 1 이상 또는 참의원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찬성
의결 : 양원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찬성
1954년 헌법
제안 : 대통령, 민의원 또는 참의원 재적의원 3분지 1 이상 또는 민의원 의원 선거권자 50만인 이상 찬성
의결 : 양원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찬성
1963년 헌법
제안 :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또는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인 이상 찬성
의결 :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국민투표(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 찬성)
1972년 헌법
제안 :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발의
의결 :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로 확정
1980년 헌법
제안 :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
의결 :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국민투표(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
1987년 헌법
제안 :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
의결 :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국민투표(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
물론 국민 발안 개헌 제도가 지고지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국민이 직접 개헌 발안권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87년 이후 무려 33년 동안 헌법을 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돼 개헌 발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탓이 큽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과 단체들이 사심 없이 나서서 국민 발안 개헌 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 대표적인 인사입니다.
그런데도 심재철 원내대표 등 미래통합당 지도부, 그리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이른바 보수 세력이 개헌안 의결을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맹목적 개헌 반대는 옳지도 않고, 이른바 보수 세력에 이롭지도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른바 보수 세력이 여당 일각의 ‘이익공유제’나 ‘토지공개념’을 핑계로 개헌을 반대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일입니다. 어차피 21대 국회가 개헌하려면 미래통합당이 동의해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개헌론자들의 상당수는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가 말하는 ‘사회주의 개헌’이나 ‘문재인 정부 장기 집권 개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허구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통합당과 이른바 보수 세력이 21대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지레 겁을 집어먹고 움츠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국민 발안 개헌안은 여야 의원 148명의 요건을 갖춰 정식으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입니다. 가결이든 부결이든 국회 본회의에서 결론을 내는 것이 옳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는 5월 7일,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5월 8일에 각각 선출됩니다. 두 정당의 원내대표가 5월 8일 국민 발안 개헌안 본회의 표결 합의를 첫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