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민심의 물줄기가 선거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권력을 창출합니다. 사람들의 기질이 열정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선거 과정과 결과도 역동적입니다.
특히 국회의원 총선거가 그랬습니다. 작은 지역구 단위로 민심이 현출하는 지역구 중심 선거제도 때문에 민심의 바람이 종종 돌풍과 이변으로 발전했습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양 김 씨의 지원을 등에 업은 신민당이 신군부의 ‘2중대’로 불리던 민한당을 밀어내고 제 1야당으로 등극했습니다. ‘신민당 돌풍’이었습니다. 돌풍의 진원지는 서울 종로였습니다. 이민우 총재가 종로에 출마해 2등으로 당선됐습니다. 당시 선거제도는 한 지역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습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호남에 ‘황색 바람’이 불며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이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을 누르고 제1야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정계에 복귀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와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개혁 공천을 밀어붙인 김영삼 대통령이 맞섰습니다. 결과는 김영삼 대통령의 승리였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 대통령과 ‘공천 학살’로 맞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결이었습니다. 결과는 이회창 총재의 승리였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치러진 2004년과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2008년 총선은 제외하겠습니다.
2012년 19대 총선은 한명숙 대표가 이끈 민주통합당이 1당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 있었지만,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주도로 당명과 강령과 색깔까지 몽땅 바꾼 새누리당이 과반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2016년 20대 총선은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 창당으로 야권이 분열하는 바람에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진박 공천’ 파동으로 민심의 외면을 자초한 새누리당은 122석 2당으로 주저앉았습니다. 당명을 바꾸고 김종인 전 의원을 영입해서 공천 물갈이를 추진한 더불어민주당은 123석 1당을 차지해 승리했습니다. 이변이었습니다.
자 이제 21대 4·15 국회의원 총선거는 어떻게 될까요? 선거는 60일 정도 남았습니다.
2월 14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정례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더불어민주당 37%, 자유한국당 21%였습니다.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 동안 조사한 결과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60일 전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와 그 이후 변화 추이, 그리고 실제 선거에서 각 정당 의석수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19대와 20대 사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론조사 수치는 모두 한국갤럽의 수치만 사용하겠습니다.
가까운 20대 얘기부터 해볼까요? 2016년 20대 총선은 4월 13일 치러졌습니다.
대략 60일 전인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 실시해서 19일에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새누리당 42%, 더불어민주당 20%, 국민의당 10%, 정의당 2%였습니다. 야당의 지지도를 다 합쳐도 32%로 여당보다 10%포인트가 낮았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직무를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은 43%였고,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은 46%였습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직무 평가와 비슷합니다. 이 정도면 여당의 압승을 예상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방심이 오만을 불렀을까요? 바로 이때부터 새누리당 ‘공천 파동’이 벌어집니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넘겨받은 명단으로 ‘진박 공천’을 시작했습니다. 당 대표 직인을 가진 김무성 대표가 이에 반발해 지방으로 내려가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새누리당은 이 상황을 홍보 영상으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무성이 옥새 들고 나르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새누리당의 이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거 직전 이틀간 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새누리당 37%, 더불어민주당 20%, 국민의당 17%, 정의당 7%였습니다. 60일 전과 비교할 때 새누리당은 5%포인트 떨어졌고, 국민의당은 7%포인트 올라간 정도입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으로 1당, 새누리당이 122석으로 2당, 국민의당이 38석으로 3당, 정의당이 6석으로 4당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지역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 중심 선거제도 때문입니다. 253개 지역구마다 ‘승자독식’ 게임이 벌어지다 보니 선거 막판 민심의 작은 변화가 거대한 변화로 폭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누리당 5%포인트 하락과 국민의당 7%포인트 상승으로 수도권을 비롯한 민감한 지역구 30여 곳에서 새누리당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하면서 새누리당이 아예 2당으로 주저앉은 것입니다.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정당 투표와 비교해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례대표 각 정당 득표율은 새누리당 33.5%, 더불어민주당 25.5%, 국민의당 26.7%, 정의당 7.2%, 기타 정당 7.0%였습니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와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8년 전인 2012년 4·11 19대 총선거에서는 어땠을까요? 대략 60일 전인 2012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조사해서 20일에 공개한 여론조사가 있습니다. 정당 지지도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2월 3주차는 민주통합당 28%, 새누리당 26%, 통합진보당 3%로 전주에 비해 새누리당 지지도가 4%포인트 하락해 (30% → 26%) 순위가 바뀌었다 .
당시 정가의 분위기는 대체로 민주통합당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명숙 대표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민주통합당 내부에서도 “과반은 몰라도 우리가 1당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보수는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반면에 민주통합당은 공천 잡음과 후보 막말 파문으로 점수를 자꾸 까먹었습니다.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는 3월 첫주에 새누리당 29%, 민주통합당 28%로 뒤집히더니, 3월 다섯째 주에는 새누리당 33%, 민주통합당 25%까지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흐름은 선거 결과로도 이어졌습니다. 새누리당 152석, 민주통합당 127석, 통합진보당 13석이었습니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은 새누리당 42.80%, 민주통합당 36.45%, 통합진보당 10.30%였습니다.
이처럼 19대와 20대 국회의원 총선거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60일 전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정당 지지도는 실제 선거 결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19대와 20대 선거에서는 60일 전 여론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갤럽도 정당 지지도를 선거 결과 의석수를 예상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안내문을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에 계속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당 지지도는 국회의원선거 지역구 ·비례대표 의석수 예상 근거로 부적절합니다 .
우리나라 지역구 국회의원선거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입니다 . 즉 , 전국 253개 선거구 판세는 정당별 후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뚜렷해진 후 각각에 대한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
단 , 전국적으로 집계되는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은 매주 약 1,000명 규모 여론조사로도 대략이나마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 이때도 현재 정당 지지도가 아닌 비례대표 투표 의향 정당을 기준으로 투표율 적용 , 무응답 배분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 사전 여론조사 응답자와 선거 당일 실제 투표하는 유권자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안내와 별도로 한국갤럽은 정당 지지도로 의석수를 함부로 예상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지난 1월 23일 ‘조사담(調査談)-사전 여론조사로 예상 가능한 정당 득표율은?’이라는 글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궁금하시면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선거 결과 예측에서 여론조사 정당 지지도보다 훨씬 더 민감하고 중요한 자료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민심을 직접 청취하는 정치인들의 ‘감’입니다.
출마 경험이 많은 정치인들은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과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당락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거나 악수를 하면서, 또는 눈빛만 봐도 “아, 이번에는 내가 떨어졌구나”, 또는 “아, 이번에는 당선되겠구나”라는 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각의 ‘촉’은 특히 몇천표, 몇백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수도권 의원들에게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제가 최근 더불어민주당 수도권 의원 세 사람과 각각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하나로 묶어봤습니다.
-선거 분위기 어떤가 ?
“이대로 가면 진다 . 1당 어렵다 . 바닥 민심이 많이 돌아섰다 . 여론조사 믿으면 안 된다 .”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나 ?
“동네 식당에 인사하러 들어가면 주인 얼굴에 싫은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잘 아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
-그런다고 투표 안 할까 ?
“안 한다 . 우리 지지층은 자유한국당 찍지 않는다 . 하지만 이런 분위기면 투표하러 가지 않을 것 같다 . 이번에도 야당과 우리가 각각 지지층 끌어모으는 선거다 . 우리 지지자들은 자유한국당 지지층처럼 견고하지 않다 . 명분이 있어야 투표한다 . 그런데 우리가 명분에서 밀린다 .”
-당신도 떨어지나 ?
“나야 워낙 탄탄하니까 당선될 것이다 . 하지만 다른 여당 의원들은 위험하다 . 아니다 . 다른 의원들도 다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도 위험하겠지 .”
-민심이 왜 돌아섰나 ?
“경제가 안 좋은데 부동산에 검찰에 코로나까지 겹쳤다 . 거기에 대통령 , 추미애 장관 , 이해찬 대표의 잇따른 실수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
-대통령이 뭘 잘못했나 ?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국 장관에게 미안하다고 한 것 때문에 욕을 많이 먹는다 .”
-종로 전망은 ?
“황교안 대표가 추격할 일만 남았다 . 선거 전에 따라 잡히면 지는 것이다 .”
-선거까지 60일이나 남았다 .
“그게 다행이다 . 이제부터 잘하면 뒤집을 수 있다 . 정신 차려야 한다 .”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어떨까요? 국회에서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통과되면서 기죽은 모습을 보였던 연말·연초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보수 통합’이 성사 단계에 이르렀고 황교안 대표가 종로에 출마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최근 기자들과 만나는 수도권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바닥 민심은 이미 뒤집혔다”는 말을 내놓고 할 정도입니다.
이른바 보수 신문의 응원전도 한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15일 치 <조선일보> 26면 ‘강천석 칼럼’의 제목은 ‘표(票)가 탄환(彈丸)이다’였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오늘은 대한민국 역사 부정 ( 否定 )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오는 4월 15일은 요동치는 비행기가 중간 기착 ( 寄着 )하는 날이다 . 국민의 탄환 ( 彈丸 )은 표 ( 票 )다 . 표가 탄환이라고 아는 국민이 나라와 민주주의를 지킨다 .
이른바 보수 신문의 ‘문재인 정권 심판론’은 올해 1월 1일부터 시작됐습니다. 앞으로도 강도를 높여가며 4월 15일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신문 보는 사람이 아무리 줄었다고 하지만 이처럼 줄기차게 선동하면 이른바 보수 성향의 자유한국당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최대한 불러 모으고 중도층이나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투표를 포기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21대 4·15 국회의원 총선거의 승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60일은 무척 긴 시간입니다. 몇 차례의 반전과 재반전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집권 여당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오만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실책이 너무 잦습니다.
선거는 흐름입니다. 막판에 상승세를 타는 쪽이 이깁니다. 방심하거나 고개를 들면 패합니다. 19대와 20대 선거에서 입증된 사실입니다.
남은 60일 동안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력과 절박감을 잃지 않는 쪽이 이길 것입니다. 여야 양쪽에 모두 적용되는 ‘선거의 진리’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