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박형준 혁신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이 1월 3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혁신통합추진위원회 제1차 대국민보고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장기표 국민의 소리 창당준비위원장, 이언주 미래를 향한 전진4.0 대표, 황 대표, 새로운보수당 하태경 책임대표, 박 위원장.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통합과 혁신 준비위원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위기 극복 대토론회’가 열린 것은 지난해 8월 20일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2017년 대선 패배, 2018년 지방선거 참패 이후 이른바 보수의 재기와 통합 시도는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명분과 가치로 전면에 나서느냐였습니다.
토론회는 박형준 전 의원이 주도했습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정병국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발언했습니다. 대체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책임이 있는 ‘친박’이 물러서고 책임이 상대적으로 적은 ‘친이명박’ 세력이 보수 재건과 통합에 나선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참 절묘했습니다. 그날 아침 <동아일보> 1면에는 ‘고교 때 2주 인턴 조국 딸 의학논문 제1저자 등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성적 우수 학생에게 주던 장학금 낙제 조국 딸에만 3년 연속 줬다’였습니다. 이른바 ‘조국 사태’의 시작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토론회 도중 옆 사람과 귓속말을 나누며 조국 장관 후보자 의혹으로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주일 뒤 두 번째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찬종 전 의원, 권영진 대구시장, 원희룡 제주지사가 참석해 발언했습니다.
저는 두 차례의 토론회에 모두 가 보았습니다. 특히 이들이 내세우는 보수의 ‘혁신’과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보수혁신과 가치 재정립을 전제로 하지 않은 보수 통합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토론회를 주도한 박형준 전 의원은 ‘혁신’과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혁신 없는 통합은 무의미하다. 통합을 통해 혁신해야 한다. 혁신 없는 통합은 선거 야합이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통합을 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원칙에 동의해야 한다. 혁신의 세 가지 요소는 1) 가치와 노선의 재정립, 2) 정당의 체질 및 운영의 혁신, 3) 공천 혁신이다.
대한민국 헌법 가치로서의 자유·공화·민주의 가치 재정립은 공동의 정체성을 묶는 기초이다. 효율적이고 유능한 정부, 시장경제와 일자리 중심의 성장 동력 회복, 삶의 질의 선진화, 한미동맹과 해양세력 연대를 기축으로 한 복합 외교, 북핵 폐기와 튼튼한 안보의 원칙을 잃지 않는 대북 정책, 공정한 법치, 국민 행복과 경제 도약을 위한 근원적인 교육개혁 등은 보수와 중도를 하나로 묶는 기본 노선이 될 것이다.
제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보수의 가치로 인정할 수는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후 조국 사태와 국회 충돌 등으로 보수 통합 추진은 지지부진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월 9일 ‘중도·보수 대통합 정당·시민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습니다. 혁신통합추진위원회 구성 등 6개 항에 합의하고 박형준 전 의원을 위원장으로 추대했습니다.
혁신통합추진위는 1월 3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1차 대국민 보고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날 오전 한국갤럽은 문재인 대통령 국정 수행 평가와 더불어민주당 지지도가 뚝 떨어진 정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니면 장소가 비좁기 때문이었을까요? 보고대회 현장은 북적였습니다. 박형준 황교안 하태경 이언주 장기표 등 다섯 사람이 손을 잡고 환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국회 사무총장 시절 박형준 통합추진위원장. 연합뉴스
혁신통합추진위는 박형준 위원장과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의 김상훈 이양수 의원, 새로운 보수당의 정운천 유의동 의원, 그리고 이언주 의원이 창당 중인 정당의 대리인, 장기표 씨가 창당 중인 정당의 대리인, 보수 성향 시민단체 대표들, 김근식 경남대 교수 등입니다.
혁신통합추진위가 주도하는 보수 통합은 2월 안에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올 것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새로운 보수당이 합치고 보수 성향 시민단체 인사들이 참여하는 정도로 통합신당이 출범할 것 같습니다.
통합신당의 파괴력이 얼마나 될까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몇 가지 한계로 인해 예상보다 울림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현재로써는 지배적입니다. 몇 가지 한계가 뭘까요?
첫째, 유력한 대선주자의 부재입니다.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정당은 예외 없이 유력한 대선주자가 있었습니다. 1996년 신한국당과 2000년 한나라당 돌풍의 주역은 이회창이라는 새로운 대선주자였습니다. 2012년 새누리당 돌풍에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있었고, 2016년 국민의당 돌풍에도 안철수 대표가 있었습니다.
이번 통합신당에 참여하는 정치인 중에서 대선주자급 정치인은 황교안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유승민 의원 정도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최근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도 밀리는 등 약세를 보입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승민 의원은 통합신당 참여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둘째, 통합의 대상이 너무 넓어서 비현실적입니다.
황교안 대표, 심재철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중도의 안철수 전 의원부터 오른쪽 끝에 있는 우리공화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 전광훈 목사까지 다 통합하겠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안철수 전 의원이 아무리 다급해도 당장 태극기 부대와 손을 잡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공화당과 김문수 전 지사가 창당한 자유통일당도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탄핵 찬성 세력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통합의 전제인 ‘보수혁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해 8월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혁신통합추진위가 내세우는 ‘혁신’과 ‘가치’에 얼마나 내용이 담겨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혁신통합추진위가 이번에 밝힌 통합신당의 가치는 자유·민주·공화·공정이었습니다. 지난해 8월의 자유·공화·민주 세 가지에 ‘공정’을 추가한 것입니다. 짐작건대 ‘조국 사태’의 영향인 것 같았습니다.
혁신통합추진위의 대국민 보고대회 문건에는 ‘통합신당의 문화 혁신, 행태 혁신 과제’라는 별도 항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른바 보수가 왜 망가졌는지 성찰한 일종의 반성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보수정당 문화와 행태 4대 문제점’이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1) 수직적 권위주의 문화
-당 대표, 원내대표만 바라보는 문화, 당 조직의 지시명령형 체계, 수평적 정보 교환 및 집단 지성을 창출하려는 노력의 부재
ex/최고위원 및 최고위원회의라는 말 자체가 상징하는 권위주의
2) 공감 능력 부족
-막말, 빈말, 메시지의 고리타분함과 꼰대 이미지. “가르치려고만 들고 경청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3) 개방성 부재
-외부의 다양한 전문가 시스템과 적극적으로 연계하려는 노력의 부재,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감수성 부족, 뒷북치는 이미지
4) 웰빙정당,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부족
보수가 망가진 원인을 ‘정치’나 ‘정책’의 실패에서 찾지 않고 ‘문화’와 ‘행태’에서 찾으려 한 점이 이채로웠습니다. 네 가지 문제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이 안고 있는 문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자유한국당의 리더십과 의사결정 구조는 여전히 권위적입니다. 젊은이들과 공감 능력이 부족합니다. 꼰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폐쇄적입니다. 웰빙 체질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군에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검사를 그만두고 전관예우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처방’일 것입니다. 혁신통합추진위는 ‘매력적인 중도·보수 통합신당을 위한 쇄신의 방향’으로 ‘체질 혁신을 위한 5대 과제’를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1. 청년 인재들이 활동하고 성장하고 충원될 수 있는 청년정당 생태계 구축
-청년 프로그램을 청년에게 운영토록 함. 이를 위한 예산 배정 의무화
-지방의원 청년 의무공천제를 통해 풀뿌리부터 청년 인재 양성
2. 당직과 국회의원직의 분리
-당직은 전문가들에게, 국회의원은 의정 활동 충실 의무
* 사무총장의 CEO화 * 스핀닥터로서의 홍보 책임자
3. 신윤리준칙 확립과 정례 평가 시스템 구축
-당 윤리준칙 확립을 통해 국회의원·당직자·당협위원장 등의 윤리적 리더십 강화를 위한 지표 구성과 평가 시스템 구축
-매년 신윤리준칙에 따른 자체 평가
4.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지역구 관리용 국회 보좌관 제도 운용 금지
-비례대표 의원, 중간평가제 도입
5. 블록체인형 토론 문화 제도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정책과 정치에 대한 토론과 공론 형성을 활성화하고 이에 대한 보상체계를 확립
어떻습니까?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손에 확 잡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연 혁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핵심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혁신이 무엇일까요? 혁신은 가죽을 벗겨낸다는 뜻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불가피합니다. 이른바 보수의 가죽이 뭘까요? 저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태극기 부대라고 생각합니다.
1987년 시민혁명과 1997년 정권교체로 위기에 몰린 분단 기득권 세력은 무덤에 들어가 있던 박정희의 유령을 이 세상에 다시 불러냈습니다. ‘잘살아 보세’와 ‘빨갱이 때려잡기’라는 박정희 신화가 ’부자되세요’와 ’종북 심판’으로 되살아 났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바로 박정희 유령의 현신이었습니다.
이른바 보수는 박정희 신화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10년 동안 집권했습니다. 그리고 파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죽을 벗겨내서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보수가 진짜로 혁신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볼까요? 중도·보수 통합을 자처하는 통합신당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혁신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첫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정당·시민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통합의 6대 원칙에서 다섯 번째로 “더 이상 탄핵 문제가 총선 승리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고 결의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옳다는 것일까요, 틀렸다는 것일까요?
어느 쪽도 아닙니다. 탄핵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과거를 묻지 말고 선거 승리를 위해 묻지 마 통합을 하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결의를 끌어안고 있는 한 이번 통합이 정치 공학적 선거용 통합임을 자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혁신이 불가능합니다. 박형준 위원장 말대로 혁신 없는 통합은 선거 야합에 불과합니다.
통합신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사유화와 그로 인한 국회의 탄핵소추,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판 절차가 끝나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할 수 있을 것습니다. 그게 정도입니다. 그게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둘째, 헌법을 부정하는 태극기 부대와 결별해야 합니다.
태극기 부대는 조원진 홍문종 의원의 우리공화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만든 자유통일당, 그리고 자유통일당의 후원자인 전광훈 목사 등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세력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재판관 8명 전원일치 결정으로 파면했습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결정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과 헌법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혁신통합추진위는 자유민주·시장경제 헌법 가치를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부정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을 부인하는 세력과 확실히 선을 긋고 결별해야 합니다.
셋째, 친박세력 공천 물갈이입니다.
영남 지역과 비례대표에 주로 포진한 자유한국당 친박 의원들도 일단 통합신당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런데 통합신당에서 이들을 그대로 공천한다면 보수혁신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저는 자유한국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은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친박세력 물갈이를 과감하게 밀어붙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오 위원장은 2016년 총선 당시 새누리당 공천 파동을 보고 환멸감을 느껴 새누리당을 탈당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시의 잘못된 공천을 바로 잡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자유한국당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1월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황교안 대표와 첫 회동을 하며 서민의 삶을 담은 그림을 선물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교안 대표의 태도입니다. 김형오 위원장의 물갈이 공천에 제동을 걸고 나설 경우 자유한국당이나 통합신당의 혁신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황교안 대표가 통합신당 지도부에 참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천의 전권을 통합신당 지도부와 김형오 위원장 등 공천관리위원회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범보수·중도 통합신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사과하고, 태극기 부대와 결별하고, 공천에서 자유한국당 친박세력을 물갈이하면, 총선에서 중도층 유권자들이 통합신당을 대거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른바 보수가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보수의 혁신을 요구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중도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도 보수의 혁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수는 혁신할 것이 아니라 아예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낫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야당이 튼튼해야 여당도 튼튼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수가 건강해져야 진보가 건강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가 진짜 보수이고, 진짜 보수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 공동체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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