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희망 대한민국 만들기 국민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불거졌습니다. 황교안 대표 퇴진론 얘기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약 1년 전인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자유한국당이 2018년 6월 지방선거 참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난파선 처지의 자유한국당에는 새로운 구세주가 필요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막강한 ‘스펙’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보수 정치인에게 필요한 점잖은 외모와 목소리, 게다가 종교적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전임 홍준표 대표에 비해 여러 면에서 ‘좀 있어 보이는’ 그를 자유한국당 사람들은 별 고민 없이 대표로 선택했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초기에 당원들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대표가 되기 전부터 ‘컨벤션 효과’로 오르기 시작한 당 지지도는 20%대에 안착했습니다.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도 한때 1위를 달렸습니다.
정치적 환경도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2019년 4월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선거법, 공수처 설치법 등을 패스트 트랙에 올리면서 여야 대치 국면이 시작됐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여야 대치 국면을 활용해 당내 리더십을 쉽게 굳혔습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하고 현직 의원도 아닌 그의 리더십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장외집회에 자유한국당 사람들이 피로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국 사태’가 터졌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는 악재였지만 황교안 대표에게는 호재였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로 규정하고 ‘자유 우파’의 유일 대안 투사로 자신의 이미지를 쌓아 갔습니다. 장외투쟁, 삭발, 단식,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그의 머릿 속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비토크라시(Vetocracy)였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황교안 대표의 대여 강경 투쟁에도 불구하고 ‘4+1’의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이 연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검찰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국회선진화법 위반 혐의로 무더기 기소했습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최근 자신들의 손에 아무 것도 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황교안 대표가 그동안 한 일은 뭘까요? 주로 자신의 대선주자 이미지 쌓기였습니다. 자유한국당과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위해서는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국회 법사위원장 여상규 의원이 1월 2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당 지도부의 리더십에 쓴 소리를 했습니다.
“악법들이 날치기 통과되는 현장에서 매우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폭거를 막기 위해선 자유주의 진영이 통합해야 하는데, 지도부는 그 방향에 대해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21대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당 대표를 포함해 모든 의원이 자리를 내려놓고, 자유주의 빅 텐트 아래 모여 당 명과 당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총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여상규 의원은 다음날 아침 <시비에스>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 부분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문답의 일부입니다.
-‘우리 당 지도부가 가진 걸 모두 내려놔야 한다 . 비대위 체제도 상정될 수 있다 .’ 이건 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
“물론 당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데는 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문제가 있고요 . 그리고 당 지도부에서 한 가지 더 깊이 있게 생각해야 될 것이 다음 총선을 위해서는 보수 대통합 ,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보수가 통합하지 않고서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 이런 생각들은 이미 다 공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그런데 당 지도부에서 보수 대통합을 위한 발걸음을 한 걸음도 못 떼고 있어요 .”
-한 걸음도 못 뗀다고 보세요 ? 지금 어제도 보니까 문을 열어놓는 이런 퍼포먼스라든지 통합하자라는 촉구의 발언도 나오고 하던데요 .
“그런 정도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요 . 당 지도부에서 통합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바른미래당 . 예컨대 유승민 의원이나 안철수 의원 같은 분들하고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될 것이고요 . 그러기 위해서는 당에서 가지고 있는 현재의 지위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
-그런데 어제 한선교 의원도 불출마 선언을 하시면서 공교롭게도 당 쇄신 방안에 대해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하셨어요 . 오히려 ‘황교안 체제를 더 공고히 해야 한다 .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오늘 나는 불출마한다 ’ 이러셨거든요 . 어떻게 보세요 ?
“그게 저하고 생각이 다른 거라고 보지는 않고요 . 당연히 이 비대위 체제로 예컨대 가더라도 그것은 통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고요 . 그래서 비대위 체제 하에서 비대위원장이 필요할 테고 그러면 비대위원장은 누가 맡든지 호선을 하든지 , 비대위 안에서 . 뭐 어느 방법도 가능하다고 보여지고요 .”
-아니 , 그런데 한선교 의원은 ‘비대위원장으로 황교안이냐 , 아니냐 ?’ 그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대표 체제를 더 공고히 하자는 뜻으로 보여서 말입니다 . 아예 그분은 비대위를 상정 안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
“그런데 지금 황교안 당 대표 체제를 공고히 하면 유승민계나 안철수계에서 과연 합당 내지 뭐 통합 . 이런 데 적극적으로 나설까요 ?”
-이대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세요 , 이 체제 이대로는 ?
“그런 면에서 회의를 느낍니다 .”
-그러면 비대위를 세우고 아예 비대위원장도 외부 인사 . 예전에 김종인 전 위원장 오셨듯이 . 이런 분들이 오셔야 된다고 보세요 ?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죠 . 다 내려놓고 기왕 비대위 체제로 가는 마당이니까 총선 때까지는 그렇게 가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둘러 표현했지만 황교안 대표 물러나라는 요구나 다름이 없습니다. 김무성 의원이 1월 3일 페이스북에 쓴 글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4·15 총선에서 우파 보수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정치는 ‘비움의 정치 , 양보의 정치 , 무사 ( 無私 )의 정치 ’입니다 .
정당은 선거를 위해 존재하고 , 선거에서 패배하면 지난 연말 국회에서와 같은 치욕만 남습니다 .
‘4·15 총선 승리 ’와 대한민국을 위해 지금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
결단의 해답은 오직 하나 , ‘우파 정치세력의 대통합 ’입니다 .
황교안 대표에게 보수 통합을 위한 ‘비움’과 ‘양보’를 요구한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의 사퇴를 직접 요구하는 목소리도 물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대선주자였던 홍준표 전 대표의 경우입니다.
12월 31일 홍준표 페이스북
의원직 총사퇴서 내지 말고 그럴바엔 내년 총선에 모두 불출마 하거라 .
무능 , 무기력에 쇼만 하는 야당으로는 총선 치루기가 어렵다 .
그러니 정권 심판론이 아닌 야당 심판론이 나오는 거다 .
석달전 패스트트랙 합의 처리를 내걸고 정기국회 보이콧 하고 의원직 총사퇴 하라고 조언 했을 때는 계속 국회의원 노릇 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나 ?
지도부가 잘못된 결정을 했으면 지도부가 총사퇴 해야지
이제 선거 앞두고 할일도 없는 국회의원들인데
국회의원 총사퇴 카드가 또 무엇을 보여 줄려는 쇼냐 ?
지도부 총사퇴하고 통합 비대위나 구성 하거라 .
나는 이미 내선거만 하겠다고 했으니 걱정 말고
통합 비대위 구성 해서 새롭게 출발 하거라 .
그래야 만이 야당이 산다 .
1월 4일 홍준표 페이스북
공천 받아 본들 낙선이 뻔한데 왜 그리 공천에 목메여 할말 못하고 비겁하게 눈치나 보는가요 ?
패스트트랙으로 기소되면 공천받아 본들 본선에서 이기기 힘들고
이겨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아래서 줄줄이 보궐선거를 하게 될 것인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없는 무능 ,무책임의 극치 정당 가지고 총선이 되겠습니까 ?
입당 1년도 안된 사람이 험지 출마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
그게 무슨 큰 희생이라고 다른 사람들 까지 끌고 들어 가십니까 ?
정치적 신념으로 정치 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으로만 정치 하면
그 정치가 제대로 된다고 아직도 생각 하십니까 ?
주변에 들 끓는 정치 부로커들의 달콤한 낙관론으로만 현 위기 돌파가 아직도 가능 하다고 보십니까 ?
위기모면책으로 보수통합을 또 선언하고
험지출마 운운 하면서 시간 끌고
그럭저럭 1월만 넘기면 자리 보전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한국 사회 양축인 보수 .우파 집단 전체가 궤멸 당하는 사태가 올수도 있습니다 .
박근혜 정권의 2인자 출신으로 박근혜 정권 궤멸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신 분이 또 한국 보수 .우파 전체를 궤멸 시키려고 하십니까 ?
이미 두달 전에 선언한대로 모두 내려 놓고 통합 비대위를 구성 하십시오 .
황 대표님 밑으로 들어 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지휘 , 복종의 관료 집단이 아닌 공감과 수평적인 인간 관계가 맺어진 정치 집단입니다 .
늦어면 늦어 질수록 우리는 수렁에 계속 빠집니다 .
이제 결단 하십시오 .
나를 버리고 나라의 미래를 보십시오 .
새해 벽두에는 희망적인 포스팅만 할려고 했는데 더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고언을 드립니다 .
홍준표 전 대표 특유의 독설로 치부하고 못 본척 할 수도 있지만 핵심은 정확히 짚고 있는 것 같아서 옮겼습니다.
그런데 황교안 대표가 더 긴장해야 지점은 자유한국당 내부가 아니라 다른 곳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보수 언론에서 마침내 황교안 퇴진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1월 1일 치 신년호 사설 제목은 ‘2020 총선의 해, 국민이 현명하게 선택하는 길밖에는 없다’였습니다. 1월 2일 치 사설 제목은 ‘정권의 폭거를 불러들인 건 야권분열이다’, 1월 3일 치 사설 제목은 ‘포퓰리즘 망국 막을 사람은 현명한 유권자뿐이다’였습니다.
연말 국회의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 의결에 대한 좌절과 분열된 야권에 대한 원망이 잘 드러나는 제목들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최근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에 대해서는 다수 여론이 찬성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주류’를 자처하는 언론이었습니다. 다수가 찬성하는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를 <조선일보>가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하는 것을 보면 <조선일보>는 더 이상 우리나라의 ‘주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조선일보> 1월 4일 치에는 앞서 세 차례의 사설을 잇는 흥미로운 칼럼이 한 편 실렸습니다. ‘강천석 칼럼’입니다. 제목은 “'황교안黨'은 必敗, '反문재인黨'으로 거듭나야”입니다.
지금 이대로면 '황교안당(黨)'은 '문재인당(黨)'에 필패(必敗)한다. 총선에 실패하면 황교안 대표의 정치생명은 그걸로 끝난다. 황 대표는 공천권에 대한 미련을 던지고 '황교안당'이 '반(反)문재인당'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누가 봐도 황 대표의 영향권 밖에 있는 줏대 센 인물을 세워 공천권과 당의 비상(非常) 관리를 맡겨야 한다. 그래야 사는 길이 열린다.
한마디로 황교안 대표 물러나라는 얘깁니다. 자 이제 황교안 대표는 큰일 났습니다. 이른바 보수의 여론을 주도하는 <조선일보>에서 공개적으로 황교안 대표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으니 말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자신에 대한 퇴진 요구를 ‘수도권 험지 출마’와 ‘보수 통합 추진’으로 방어하려는 것 같습니다. 잘 될까요?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수도권 험지 출마는 사실 그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당 대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면서 자신이 희생하는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국민과 당원을 속이는 일입니다.
보수 통합 추진도 위력이 없습니다. 당내에서는 그의 보수통합을 ‘극우통합’으로 비판하는 분위기입니다. 진정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창당 절차를 밟고 있는 ‘새로운 보수당’ 사람들에게 입당을 허용한 조처는 유승민 의원을 차단하기 위한 꼼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중도를 표방하는 안철수 전 의원이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과 손잡을 가능성도 전무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수도권 험지 출마나 보수 통합 추진은 그가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비로소 진정성을 인정받게 되는 역설적 상황인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로서는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꼬였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자유한국당과 황교안의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지난해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 나선 사람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진태 의원이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황교안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과 탄핵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세훈 전 시장은 탈당 경력이 문제였습니다.
자유한국당 당원들이 전당대회에서 오세훈 전 시장을 선택했다면 자유한국당이 깨졌을 것입니다. 친박 세력이 대거 탈당해서 우리공화당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의 악몽에서 벗어나 합리적 보수,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며 중도층으로 기반을 확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유한국당 당원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혁신’ 대신에 ‘쉬운 안주’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퇴진론은 한번 불어지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당분간 정가의 관심은 황교안 대표의 퇴진 여부에 쏠릴 것 같습니다. 황교안 대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사고 방식은 정치인이 아니라 종교인에 가깝습니다. 지금 물러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지금 물러나면 그나마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황교안 대표의 퇴진 여부를 결정해야 할 사람이 어쩌면 황교안 대표 자신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보수 세력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당원들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몫일 수 있습니다. 정치, 참 비정한 것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