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공수처법 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 참석자들이 국회 본관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경찰들이 막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지난 16일 태극기 부대 국회 난입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 나타났습니다. 과거 ‘어버이 연합’과 우리공화당 등 박근혜 대통령 석방 및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모든 세력의 연합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들은 주로 서울역 앞 광장과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 집회를 했습니다. 광장은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광장에 나가서 집회하고 시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광장에서 하는 태극기 집회는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회는 광장이 아닙니다. 국회는 대의민주주의의 중추적 기관입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 갈등하고 대화하고 절충하고 타협하고 의결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국회에서 집회와 시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회 기자실인 정론관 브리핑룸에서도 구호를 외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 국회에 태극기 부대가 난입했습니다. 황교안 대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태극기 부대를 국회 경내로 끌어들였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정의당 사람들 머리채를 잡고 침을 뱉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을 폭행하며 “빨갱이 잡았다”고 낄낄거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태극기 부대의 국회 난입 및 만행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국회 사무처 직원과 보좌진, 그리고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들입니다.
16일 오전부터 국회 안으로 밀려 들어온 태극기 부대는 수십명, 수백명씩 무리 지어 국회 본관 주변을 빙빙 돌며 건물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회 사무처 직원, 보좌진, 기자들과 마주쳤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일단 험한 욕부터 해댔습니다.
“야 이 빨갱이 00들아! 씨00들아! 확 00을 뽑아버릴까보다! 똑바로 보도해 00들아! 핸드폰 치워 이 00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입에서 그렇게 험한 욕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욕을 심하게 해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은 뭔가에 취한 듯 이글이글 타고 있었습니다.
태극기 부대 주력은 국회 본관 2층 앞 주차장에서 종일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국회 기자실은 1층 앞쪽에 있기 때문에 태극기 부대가 지르는 소리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니 귀가 먹먹했습니다.
이날 태극기 부대의 행패를 겪은 한 기자는 “노인을 공경하라고 배웠는데 이번 일로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다른 기자는 “국회 침투에 성공했다는 승리감에 도취한 탓인지 광화문에서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국회로 몰려들었지만, 국회 담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16일 국회 경비에 실패한 경찰이 국회 출입구를 철저히 틀어막았기 때문입니다. 국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태극기 부대는 국회 앞에서 매일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의 요구 사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들이 국회로 몰려드는 이유가 뭘까요? 태극기 집회를 알리는 우리공화당 보도자료의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좌파독재 악법 공수처 저지
우파궤멸 음모, 연동형 비례대표제 저지
죄 없이 불법 인신 감금 1000일, 박근혜 대통령 석방
문재인 좌파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자!
간명하지요? 그들은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의해 정당하게 이뤄진 탄핵 절차와 결과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의해 정당하게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회법에 따라 진행되는 입법 절차와 내용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통째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너무나 정치적이고, 틀에 박힌 주장입니다.
태극기 부대가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요? 태극기 부대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제가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16일 저녁 태극기 부대가 국회 경내를 빠져나갈 즈음 저도 국회 밖으로 나와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여의도역 쪽으로 가는 전철을 탔습니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사람이 태극기를 둘둘 말아 가방에 넣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꽤 고급이었습니다. 다소곳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무척 교양이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조금 전까지 국회 경내를 휘젓고 다니며 젊은 사람들을 향해 극단적 욕설을 퍼붓던 노인들과, 전철에 얌전히 앉아서 친구와 조용히 대화하는 노인들이 같은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왜 모이기만 하면 극도의 공격성을 띠는 것일까? 인터넷에는 이런 문답이 떠 있었습니다.
질문 :
태극기 부대는 왜 항상 화나 있나요? 도대체 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미국 깃발을 들고 춤을 추고 소리 지르고 20~30대 사람이 지나가면 막대기 들고 때리려 하고 진짜 왜 그래요? 해외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창피해 죽겠네요.
답변 :
그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죄가 없다고 믿고 있으며 문재인 정부가 죄 없는 박근혜를 가둬 놓고 안 풀어 준다고 화가 나 있습니다.
역시 너무 정치적이고 뻔한 답변입니다. 논문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2018년 한국정치학회보에 실린 <인정을 위한 저항 : 태극기 집회의 감정 동학>(김진욱 허재영)이라는 논문이 있었습니다. 초록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연구는 태극기 집회에서 발생한 사회적 인정과 정치적 저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사회적 무시가 낳은 모멸감은 정치적 저항이 촉발되는 데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모멸감은 비슷한 속성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이 감정은 잠재되었다가 특정한 계기에 의해 집단적 저항으로 분출되곤 한다. 집단적 저항은 모멸감의 생성, 확산, 그리고 행위를 통한 분출의 과정을 따라 발생한다. 이러한 경로를 태극기 집회를 통해 살펴보고 인정받기 위한 저항의 과정을 분석하였다. 태극기 집회의 주된 참여자는 노년층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던 존재들이었다. 결국 이들의 누적된 모멸감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하는 촛불 집회를 계기로 결집되었다. 이 연구는 태극기 집회 주최 측과 태극기 언론은 모멸감에 내재된 노년층의 도덕적 신념을 강화시켜 집단적 저항에 참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꽤 설득력 있는 분석이었습니다.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의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당신이 옳다>(2018)라는 책이었습니다. 책에서 이런 대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소동이 끝난 후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소란에 대해서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살았던 시절로 갔다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로 옮겨왔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말했다.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사과를 받고자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지만 노인은 사과를 했다. 사과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노인의 마음속에 미안함이 조금씩 고이고 있다는 걸 대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보수단체에서 개최한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모두 어르신들 덕분이다. 어르신들이 진정한 애국자다. 오랜 세월 고생 많으셨다”는 얘기를 듣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노인이 말도 안 되는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들(보수단체 강사 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오랫동안 온기조차 없었던 방구들에 불이 지펴지듯 마음이 덥혀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그 당당한 폭력을 후회한 것도 자기 존재에 주목해 주고 자기 삶에 귀 기울여준 사람(나)을 만나서였다.
길에서 어버이 연합 노인을 만났을 때 노인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던 “종북 세력,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얘기를 뒤로 물리고 “밥은 드셨어요?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한 것은 이야기의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라는 존재의 중심에 빠르게 들어가기 위해 부질없는 논쟁이 될 게 뻔한 시국과 관련한 얘기들을 뒤로 치워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날 그곳에서 그 노인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노인도 그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수렁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공감은, 생각과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그 부위에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꽂히는 치유 나노로봇이다. 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정교하며 부작용 없는 치유제를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어떻습니까? 저는 정혜신 씨의 책에서 태극기 부대 구성원과 그들의 분노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태극기 부대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처방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입니다. 가정에서 자식들의 외면으로,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경멸로 상처받은 노인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 원하는 인정 욕구가 있습니다. 사랑받기 원하는 사랑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원초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무시당하고 경멸당한다고 생각하면 열패감과 모멸감을 안고 키우게 됩니다. 열패감과 모멸감은 적절한 계기가 생기면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 증오와 분노로 폭발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태극기 부대 노인들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젊은 사람들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안에 태극기 부대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태극기 부대 노인은 바로 나의 미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9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문제의 핵심은 노인들이 아닐 것입니다. 노인들의 열패감과 모멸감을 자극해 분노를 증폭시키고 선동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이른바 보수 기득권 세력의 탐욕이 훨씬 더 큰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악마는 귓가에 은밀한 속삭임으로 사악한 마음을 부추겨 사람을 조종한다고 합니다. 황교안 대표와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태극기 부대 노인들에게 혹시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닐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