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기사에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김지영씨가 딸아이의 옷을 삶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장난감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고, 아이를 씻기고. 쉴틈없는 가사노동을 마치니 남편 정대현씨가 퇴근하네요. “저녁 안먹었지? 밥 차려줄게.” 왠지 지영씨의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23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흥행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예매율 1위를 놓치지 않더니, 개봉 5일만인 27일에는 관객수 100만을 넘어섰습니다. 2016년 발간된 동명의 원작 소설은 출판계에서 9년만에 등장한 ‘밀리언셀러’ 소설로 기록됐습니다. 외할머니-엄마-딸로 이어지는 ‘공기같은’ 성차별을 담담하게 그려내 다양한 연령층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가장 큰 흥행 이유로 꼽힙니다.
숫자로는 아직 부족하지만 국회에도 ‘일하는’ 김지영씨들이 있습니다. 13대 국회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한 여성 국회의원은 20대 국회 들어서 처음으로 50명을 넘어섰고, 이들은 여성 관련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합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요 장면과 함께, 수많은 ‘김지영’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만들어진 20대 국회의 여성 관련 법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당신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오빠, 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 할까? 저기 길가에 있는거.” (지영)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일이야?”(대현)
아이를 낳고 다니던 홍보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지영. 갓 두돌밖에 지나지 않은 딸아이탓에 지영의 눈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구인 공고만 들어옵니다. 2017년 3월 국회에서 통과된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경력단절여성의 ‘복직’에만 초점을 둔 기존 법안을 보완하는 취지로 마련됐습니다. 경력단절여성을 지원하는 여성새로일하기센터의 업무에 경력단절 ‘예방’ 기능을 추가해, 여성의 경력단절을 사전에 막는 정책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죠. ‘경력단절’의 정의에도 ‘출산’뿐만 아니라 ‘혼인’까지 포함시켜 여성의 생애주기에 더 적합한 정책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일부개정법률안’ 보러가기
#2. 성희롱 예방교육? 너때문에 하는거 맞아
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도대체 이런 강의를 왜 하는거야, 이유가, 목적이?”(대현 직장동료1)
“야 너 때문에 하는거야, 너 들으라고. 여직원들 대할 때 조심좀 해라.”(대현 직장동료2)
직장 워크숍을 떠난 대현의 동료들이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은 뒤 쉬는시간에 나눈 대화입니다. 2017년 11월 통과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강화하고, 직장내 성희롱이 발생할 경우 사업주의 조치 의무 등을 강화하도록 했습니다. 사업주가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지 않거나, 성희롱 피해자 보호조치등을 적절하게 하지 않은 경우에도 과태료를 부과하는 처벌기준을 마련했죠. 성희롱 관련 불이익의 내용에는 ‘근로조건에서의 불이익’도 포함됐는데, 사업주가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노동자 혹은 피해 노동자에게 인사등 근로조건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 역시 ‘성희롱 관련 불이익’에 해당한다고 폭넓게 규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보러가기
#3. 아이는 함께 키우는 거잖아
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아기 낳으면) 난 너무 많은게 변할 것 같은데 오빠는 변하는게 뭐야?”(지영)
“나? 나도 변하지~ 일찍 들어와야되고, 술도 못먹고, 친구도 못만나고.” (대현)
출산·육아라는 말만 들어도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며 덜컥 겁이나는 지영과 달리 대현의 답은 좀 단순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고, 아빠는 잘 도와주면 된다’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탓이죠. 지난 8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은 배우자 출산휴가 기간을 현행 5일에서 10일로 확대하고, 휴가기간 전체에 ‘통상임금에 상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유급휴가로 지정했습니다. 남성들에게 자녀양육 참여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이 주요 취지입니다. 여기에 더해 근로자가 자녀 양육, 질병등의 이유로 긴급하게 가족을 돌봐야하는 경우 연간 10일의 범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족돌봄휴가” 조항도 확대했습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보러가기
#4. 디지털성범죄, 처벌은 더 강하게
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내가 화나는건 오과장이야. 인터넷에서 그 사진들 발견하고 우리 회사인줄 알았으면 신고를 해야지, 어떻게 남자사원들이랑 돌려볼 수가 있냐.” (지영의 전 직장동료)
지영이 다니던 홍보회사의 여자화장실에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되고, 직장 내 남성 동료들이 피해촬영물을 돌려봤다는 사실이 발각됩니다. 피해자들은 경찰서에서 자신이 찍힌 촬영물을 확인해야한다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그저 재미로’ 피해촬영물을 유포한다는 사실이 많은 여성들을 더욱 절망하게 만듭니다.
지난해 11월 국회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불법촬영물 범위 및 유포범죄의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타인의 신체를 동의없이 촬영하고 이를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 현행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 수위를 높였습니다. 동료들이 찍힌 피해촬영물을 ‘남자사원들과 돌려본’ 오과장에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찍은 촬영물이라고 하더라도 제3자가 동의없이 유포하면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한 비동의 촬영물 유포죄에 대해서도 벌금형을 삭제하고 징역형으로만 처벌하도록 했습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 보러가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물론, 이같은 법률이 제정된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건 아닙니다. 다시 영화의 몇 장면을 살펴볼까요.
“애 엄마가 나가서 벌면 또 얼마나 벌겠습니까. 정 일하고 싶으면 근처 아르바이트도 있을낀데. 남편을 육아휴직을 내고 집에서 놀라는게 그게 말이되나 말이지요.” (지영의 시어머니)
“육아휴직 썼던 선배들 보니까 눈치보여, 승진도 밀려. 분위기가 그렇다는거지 분위기가.” (대현의 직장 동료)
“전 왜 기획팀에 안데려가셨어요?” (지영) / “지영씨 부족해서 그런거 아냐. 회사에서 5년 이상 장기팀을 만들길 원하는데, 아무래도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 때문에 좀 힘들잖아.” (김 팀장)
남성근로자의 육아휴직이 가능해진건 1995년부터였지만(남녀고용평등법 제11조), 대현은 부모님의 강한 반대와 사회적 인식때문에 육아휴직을 쓰기 망설입니다. 대현이 유난을 떠는 건 아닙니다. 2016년 기준 오이시디(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남성 육아휴직 비율은 8.5%로, 스웨덴(45.3%), 아이슬란드(45.2%)등에 견줘 턱없이 낮은 수준입니다.
‘근로자의 교육·배치 및 승진에 있어서 여성인 것을 이유로 남성과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한 ‘남녀고용평등법’은 지영이 태어나고 6년 뒤인 1988년에 제정됐습니다. 그러나 지영은 ‘결혼과 육아가 예상된다’는 이유로 기획팀에 속하지 못하고, 지영의 ‘여성’ 동료들은 남성 동기들에 견줘 ‘당연하게’ 승진이 늦는게 현실입니다.
여성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는 28일 기준 234건의 법안이 계류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을 위한 법안이 만들어지는 것도 좋지만, 법을 계기로 개인의 일상이 바뀔 수 있어야 더 많은 ‘김지영들’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