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정치인에게 ‘정치가 무엇인지 솔직히 말해보라’고 하면 “내가 국회의원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는 정가의 우스개가 있습니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우스개도 있습니다. 정치인이 국회의원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설명할 때 하는 말입니다.

정치인만큼 소명(召命)이라는 단어와 출세(出世)라는 단어가 동시에 잘 어울리는 직업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정년도 없습니다. 정치인이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정치인은 대개 공천을 받지 못하는 낙천이나, 선거에서 떨어지는 낙선에 의해 퇴장합니다. 옛 전사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을 영예로 여기던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이철희 의원(55)과 경기도 용인정 지역구 표창원 의원(53)이 2020년 4·15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초선 국회의원의 차기 총선 불출마는 무척 이례적인 일입니다. 몇 신문이 10월 26일 치 사설로 다뤘습니다.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두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계기로 정치권의 성찰, 그리고 인적 쇄신을 요구했습니다. <경향신문>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반대로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최근 출마로 돌아서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비판하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거론했습니다. 네 신문의 사설은 어쨌든 이철희 표창원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두 의원의 불출마를 그냥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두 의원이 왜 국회의원직을 그만두겠다는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원문은 너무 긴 편이니 ‘이유’에 해당하는 부분만 소개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철희 의원은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우리 정치를 바꿔놓을 자신이 없다”, 표창원 의원은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정의’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두 사람 모두 ‘조국 사태’를 겪으며 한계를 느껴 이제 국회의원직을 그만두겠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의 사퇴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철희 표창원 의원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만류한 동료 국회의원들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철희 표창원 의원의 불출마 논리보다 김성식 김영춘 김현권 의원의 반박 논리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박상훈 박사가 정치학 강의를 모은 <정치의 발견>(2011, 폴리테이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박상훈 박사는 이 책에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조화를 강조한 막스 베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이철희 표창원 의원은 널빤지를 뚫다가 중단했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열정이었을까요, 아니면 균형 감각이었을까요?

아무튼 두 사람은 국회의원을 이제 그만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정치에 기여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국회의원이 아니면 정치에 기여할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제 정치를 은퇴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물론 정치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두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좀 엉뚱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정치인의 명예로운 자발적 은퇴’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원조보수’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입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전두환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민정수석 시절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직언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땡전뉴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직언해 ‘땡전뉴스’를 없애도록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의 총선 출마를 막았습니다. 19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건의했습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남 밀양에 출마해 당선된 뒤 17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2008년 1월 갑자기 이런 내용의 불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김용갑 전 의원의 은퇴 선언 다음 날 김진현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 전화로 “그동안 보수라고 하면 부패하고 부도덕하고 기득권을 절대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인 집단이란 인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김 의원의 용퇴로 보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걸 국민들에게 확인시켜주었으니 이보다 더 굉장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용갑 전 의원이 <굿바이 여의도>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김용갑 전 의원은 자신의 소원대로 박수칠 때 떠났습니다. 그의 이념과 정치 노선에 저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지만, 정치인으로서 그의 깔끔한 뒷모습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철희 표창원 의원의 불출마 선언에 흔쾌히 동의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철희 표창원 의원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김용갑 전 의원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내년 총선은 쉽지 않은 선거입니다. 대통령 임기 중반을 지나서 치르는 총선은 정권에 대한 심판 선거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두 달간의 조국 사태로 깊은 내상을 입었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더불어민주당이 1당을 빼앗기고 문재인 정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감한 인적 쇄신과 정책 혁신이 필요합니다. 인적 쇄신은 청와대 참모, 행정부 고위직, 당 지도부, 그리고 중진 다선의원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젊고 유능한 초선 의원들이 조국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며 성급하게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보다는 정책 혁신에 기여하거나 ‘험지 출마’ 등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위한 결단과 희생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