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3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나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찾아가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1여 3야’가 추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선거제도 개편안의 ‘신속처리 안건’(패스트 트랙) 지정에 정가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1여 3야’는 전국 단위 정당 득표율 절반에 연동해서 비례대표 의석을 우선 배분하고, 그렇게 해서 남는 비례대표 의석을 정당득표율에 따라 추가 배분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남은 일은 각 정당 내부 의견 수렴, 선거법 조문화 작업, 선거법과 함께 패스트 트랙에 올릴 법안 논의 등입니다. 만만치 않은 고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협상이 여기까지 진전된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저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선거제도 개편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의원들의 선거법 개정 의지가 약하다고 봤습니다.
둘째,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내부 리더십이 취약한 상태에서 의원들의 뜻을 모으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습니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역시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기자는 객관적이고 냉철하고 분석적입니다. 대체로 비관적입니다. 정치인은 주관적이고 무모하고 종합적입니다. 대체로 낙관적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정치인을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치 환경이 크게 달라진 탓도 있을 것입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습니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황교안 대표가 선출되고 전당대회 효과로 자유한국당 지지도가 오르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와 더불어민주당 정당 지지도는 하락세입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 등 이른바 ‘문재인 개혁법안’은 자유한국당의 완강한 반대로 당분간 국회 통과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으로서는 위기 상황입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입에서 “이러다 큰일 날 것 같다”, “총선이 아무래도 어려워질 것 같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선거법 개정으로 다소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검찰개혁 등 최소한의 성과를 내지 않으면 정권 자체가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른미래당 태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바른미래당의 김관영 원내대표는 ‘한겨레 티브이(TV)’에서 제가 진행하는 ‘더정치 인터뷰’에 1월24일 출연했을 때 “선거법은 게임의 룰이니 패스트 트랙에 올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2월21일 출연한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 2월28일 출연한 유의동 바른미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자유한국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거법 개정안을 패스트 트랙에 올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관영 원내대표도 3월13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선거제 개편 법안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 트랙)으로 지정해도 최종적인 의결 절차가 아닌 만큼, (이것이) 여야 합의 처리를 위한 신속한 협상의 촉매가 되길 기대한다. 자유한국당의 전향적인 자세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습니다.
바른미래당의 태도가 크게 바뀐 것은 자유한국당이 현행 선거법을 개정할 의지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양강’(민주당·자유한국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현행 선거법으로는 2020년 총선에서 바른미래당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민주평화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한국당 분위기는 반대입니다. 자유한국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최근까지 민주당과 ‘야 3당’에 의한 선거법 패스트 트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3월6일 자유한국당 ㄱ 의원이 선거법 패스트 트랙에 대해 친한 기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거칠지만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가급적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는 흐리멍덩하게 가는 게 전략이다. 대놓고 반대하면 ‘너희 안 해? 그럼 패스트 트랙 태운다’ 이럴까 봐. (민주당 등 여야 4당이) 단일안 만들어서 패스트 트랙 태운다고 해도 (최장 330일 이후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된 뒤 국회의원 지역구를 나누는 문제가) 선관위 선거구 획정위로 넘어가고, (획정위가) 획정안을 국회에 내면 그걸 표결해야 한다. 선거법에 별첨으로 달리는 것 있잖나. 그걸 우리가 받겠어? 안 받지. 그럼 또 그걸 패스트 트랙 할 건가? 그러면 선거 기간이 넘어간다.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패스트 트랙을 두 번 해야 하는 데 그게 되겠나.
그래서 나는 민주당이 공수처법이랑 개혁입법 하기 위해서 평화당과 바른미래당을 속이는 것이라고 본다.
패스트 트랙 한꺼번에 하려면 선거구 조정안까지 나와야 한다. 그 (조정)안 아직 공개 안 됐지? 그거 나오면 당장 민주당 내에서도 반발할 것이다. 민주평화당이나 민주당에 물어봐라. 패스트 트랙 두 번 할 거냐고. 선거구 획정은 정해진 거냐고. 정말 만약에 선거구제가 그렇게 개편된다고 하면 우리는 전부 의원직 총사퇴하고 맞서야지.”
자유한국당 ㄴ 의원도 같은 날 기자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당 의원들은 선거제도는 현행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많다. 민주당에서 패스트 트랙 올리면서 자꾸 우리당 당론을 달라고 하는데 그러면 270명에 비례대표 없애는 거로 던져야지. 그러면 던지는 순간 판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민주당 안 가지고 협상을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안을 내면 협상이 더 안 되는 것 아닌가.
우리 안이 3개였다. 김성태안(225+75, 도농복합), 270석안, 나경원안(권력구조 개편 전제). 그중에 270석이 차라리 더 많다. 그런데 그러면 정개특위에서 협상이 되겠어? 차라리 현행으로 하자는 것이다. 지금 자꾸 안을 내라고 하면 낼 게 270석밖에 없다. 민주당도 패스트 트랙 태워봤자 (최장) 330일 후가 되면 의원들 다수가 반대할 것이다.”
실제로 나흘 뒤인 3월10일 나경원 원내대표가 기자 간담회를 열어 현행 300석인 국회의원 정수를 27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를 없애는 내용의 선거제도 개편안을 내놨습니다. 선거제도 개편안을 먼저 처리하고 권력구조 개편을 논의한다던 지난해 12월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 합의문을 뒤집어 선거제도와 권력구조 개편 논의를 같이 진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또 ‘선진국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까지 했습니다. ㄴ 의원 말대로 판을 깨기 위한 제안을 한 셈입이다.
그 뒤로 자유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좌파 장기집권을 위한 선거제도”라거나 “공수처는 좌파 망나니 칼춤 기구”라는 등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여론전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패스트 트랙은 좌파 운동권 세력의 장기집권 야욕이다>
선거제 개편은 민주주의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이기에 헌정사상 언제나 여야 합의 처리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전 세계에서 의원내각제 국가 단 두 군데에서만 운용하는 ‘이례적인 선거제도’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패스트 트랙은 좌파 운동권 세력의 장기집권 야욕이다.
대통령제 국가인 우리나라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문재인 좌파독재 정권의 2중대, 3중대만 양산하게 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하듯, 대한민국도 우파와 좌파의 두 날개로 건전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당·정의당·민평당은 개헌선인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확보해, 개헌으로 좌파독재의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민주당·정의당·민평당의 ‘선거제 개악(改惡) 야합 카르텔’에서 서둘러 탈퇴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패스트 트랙을 통한 좌파 운동권 세력의 장기집권 플랜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선거제 개악을 위한 패스트 트랙 야합을 결사 저지하여, 좌파독재 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을 반드시 분쇄할 것이다.
2019. 3. 15.
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 이양수
어떻습니까? 자유한국당의 논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자유한국당이 대국민 홍보전에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색깔론’과 ‘반정치주의’입니다. ‘색깔론’과 ‘반정치주의’는 우리나라 분단 기득권 세력이 오랫동안 사용한 무시무시한 칼입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그 위력이 엄청납니다. 색깔론과 반정치주의가 왜 무서운지는 다른 기회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최근 정세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은 깨졌다. 대화 재개는 어렵다. 정당 지지도는 바닥에서는 이미 뒤집혔다. 4월3일 국회의원 보궐선거 두 곳 모두 우리가 이긴다.”
“문재인 대통령은 능력이 없다.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에 실패할 것이다. 2020년 4·15 총선은 우리가 이긴다.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도 우리가 이긴다.”
자유한국당이 이런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승자독식’ 원리가 작동하는 현행 국회의원 선거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최근 ‘1여 3야’의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자유한국당도 연일 긴급 의원총회와 대책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번 선거법 패스트 트랙을 둘러싼 자유한국당과 ‘1여 3야’의 대치는 앞으로 2022년까지 대한민국 정치를 좌우하는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승리하면 문재인 정부는 임기 중반에 국정 운영의 동력을 통째로 상실할 위험이 있습니다. 민주당은 내년 총선에서 패배해 1당 지위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도 내년 총선에서 생존 공간을 찾기 어렵게 됩니다. 바른미래당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의원들이 제각각 살길을 찾아 흩어지며 와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1여 3야’의 선거법 패스트 트랙이 성공하면 자유한국당은 의원직 총사퇴를 선언하고 전면적 투쟁에 나설 것입니다. 의원직을 진짜로 사퇴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의원직 사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세비를 반납해야 하고, 보좌진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고, 후원회 계좌도 폐쇄해야 합니다. 정치를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맡기고 의원직 신분은 유지한 채 강력한 정치 투쟁에 나서는 정도의 방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유한국당도 어쩔 수 없이 선거법 협상안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싫겠지만 불가피한 일입니다. 자유한국당이 선거법 개정안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1여 3야’와 지루한 협상 국면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당내 의견수렴 과정에서 수도권과 영남 의원들의 의견이 달라 분열의 씨앗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패스트 트랙 이후 정국을 생각해 보면 양쪽 모두 지금의 선거법 패스트 트랙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정치도 첨예한 상태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절박한 쪽이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거법 패스트 트랙 국면을 바라보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이 더 절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