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는 프랑스어가 있습니다.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 즉 해질녘을 의미합니다. ‘개늑시’는 아늑하면서도 불안한 시간입니다. 신기한 것은 개늑시에 사진을 찍으면 멋진 장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명 지대’(twilight zone)라는 영어가 있습니다. 본래는 빛이 도달하는 바닷속 가장 깊은 층, 행성의 표면에서 낮과 밤이 구분되는 경계를 이루는 선, 도시의 슬럼화되고 있는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작가들은 이 말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 ‘온갖 괴이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에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상자 안의 고양이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느닷없이 문학과 과학 얘기를 꺼낸 이유는 불가측성과 역동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정치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1997년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2016년 촛불과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정치 혁명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뒤 세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김정은-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이에 맞물려 벌어지는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의 지각 변동은 21세기 초입의 세계사적 기적입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한반도 지각 변동에 저항했던 자유한국당은 참패했습니다. 주춤거린 바른미래당도 몰락했습니다.
6·13 지방선거 이후 3개월이 지났습니다. 내년 4월3일 재보궐선거까지는 선거가 없습니다. 선거와 정치 얘기는 뉴스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진짜 정치는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 ‘여명 지대’에 들어섰습니다. 당분간 각 당 내부의 권력 투쟁은 오히려 더 치열하게 벌어질 것입니다. 2022년 3월9일로 예상되는 20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대선주자들을 ‘인큐베이팅’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역대 대통령 당선자들은 예외 없이 선거 3~4년 전쯤 각 정당 내부에서 유력한 차기 주자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다 그랬습니다. 다음 대통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6개월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대선주자군의 부상과 함께 각 정당 내부의 근본적 변화도 시작될 것입니다. 2016년 4·13 20대 총선은 이변이었습니다. 2020년 4·15 21대 총선은 더 큰 이변일 수 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무장한 새로운 유권자들이 각 정당 당원과 지지자로 급속히 유입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의 지속 여부는 2020년 4·15 총선의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목표는 ‘민주정부 20년 집권’입니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의 목표는 ‘보수의 재건’입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의 목표는 협치의 제도화, 즉 ‘다당제’입니다.
누가 성공할까요? 각 정당이 맞닥뜨린 도전 과제와 도약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기회 요인은 무엇일까요? 흐름에 밝은 여야 의원, 고참 보좌관 몇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민주정부 20년 집권’의 첫 관문은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하락 추세를 멈추고 50% 안팎에서 등락 국면에 접어들 것입니다. 최저임금 인상,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야당의 공세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야당과 이른바 보수 언론의 ‘종부세 폭탄’ 주장도 먹혀들지 않고 있습니다. 경제 논쟁에서 정치적 거품이 걷히면서 유권자들이 차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를 향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질주도 국민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앞으로 2~3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운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운명과 엮여 있다고 봐야 합니다. 트럼프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선방하고 2020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면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은 ‘관리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해찬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당정 관계, 당정청 관계는 꽤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정책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도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책임총리의 ‘2인3각’이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의 ‘2인3각’으로 재연될 수 있다면,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커질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정치인은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김경수 경남지사입니다. 이낙연 국무총리,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송영길 의원,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도 있습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일단 국회로 돌아와서 정치 역량을 증명해야 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습니다.
민주당의 차기 경쟁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당원과 지지자들의 마음을 누가 많이 얻느냐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보수의 재건’에 안간힘을 쓰는 김병준 비대위원장 체제의 자유한국당 분위기는 침울하기만 합니다. 자유한국당 지지도는 10% 초반에서 게걸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유한국당에는 지금 지도자가 없습니다. 자유한국당 인사는 “우리에게 손학규라도 있었다면 이 지경은 아닐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정치 현안에 대한 코멘트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당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박’이 최근 김병준 위원장을 서서히 흔들기 시작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김병준 위원장도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당협위원장 일괄 사퇴를 의결하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긴장감은 높아져가지만 그렇다고 당 지지도가 올라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한국당 내부는 여전히 친박과 비박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념이 아니라 밥그릇 때문입니다. 친박의 징표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박근혜 전 대통령입니다. 둘째, 중대선거구제 반대입니다. 대구·경북 의원들은 현행 소선거구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유한국당의 운명은 내년 1~2월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비박은 당권을 장악하면 친박 상징성이 큰 몇 사람을 쫓아내고 정계개편을 한 뒤 2020년 총선에 나설 것입니다. 바른미래당을 흡수하거나 신설 합당으로 새로운 보수 정당을 만드는 방안이 있습니다. 비박의 이런 구상에 친박이 반대하는 이유는 물론 의원직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의원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유한국당 대표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김무성 전 대표, 김성태 원내대표, 홍준표 전 대표, 황교안 전 국무총리, 나경원 의원, 심재철 의원, 정우택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이완구 전 국무총리 등입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친박과 비박의 합의 추대로 대표를 계속하는 방안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현재 출마 및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김무성 전 대표입니다. 그러나 당내 반발이 걸림돌입니다. 김성태 원내대표가 나서고 김무성 전 대표는 뒤에서 밀어주는 방안도 거론됩니다.
누가 됐든 비박이 당권을 장악하고 친박들을 제거할 경우 친박들은 탈당을 결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통 보수라는 명분과 대구·경북이라는 지역을 결합하면 원내교섭단체는 충분히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2020년 총선 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유한국당의 12월 원내대표 경선은 1~2월 전당대회의 전초전입니다. 비박에서는 강석호, 김학용 의원 등이 출마를 준비 중입니다. 1년 전에 나섰던 홍문종, 한선교, 유기준 의원이 다시 출마할 수도 있겠지만 당선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보입니다. 친박이 어떤 카드를 빼들지 궁금합니다.
손학규 대표가 이끄는 바른미래당은 선거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로 바뀌지 않는 한 2020년 총선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 살아남기 어려워 보입니다. 선거제도 개편과 개헌에 사력을 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독일에 가 있는 안철수 전 대표, 국내에 있지만 거의 잠수 상태인 유승민 의원은 정국 흐름을 살피며 부활을 노릴 것입니다.
살다 보면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리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정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