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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과제’엔 맞서지 않는 게 야당의 지혜…홍준표 대표는?

등록 2018-05-13 15:06수정 2018-05-13 15:13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07

자유한국당, 북-미 정상회담 일정을 ‘6·13 지방선거용’ 주장
국민 절대다수가 찬성하는 사안에 반대해 정치적 고립 자초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정부 취임 초기 강력한 개혁 지지
이회창 전 총재는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 ‘친북정책’으로 해석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3일 오전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6·13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해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3일 오전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6·13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해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미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가 발표된 다음 날 자유한국당의 ‘6·13 지방선거 대구 필승결의대회’에서 홍준표 대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한다고 오늘 발표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얼마나 북한과 문재인 정권이 지방선거 전에 정상회담해 달라고 사정을 했겠는가. 나는 지방선거 후에 미-북 정상회담하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사정했으면 하루 전에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한다. 결국은 남북평화 쇼, 6·13 지방선거를 덮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이용해 6·13 지방선거에서 이기려고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에 정상회담을 앞당겨 달라고 사정했다는 주장입니다. 근거가 있을까요? 물론 없을 것입니다. 장제원 수석대변인도 비슷한 논평을 냈습니다.

“지방선거 직전에 미-북 정상회담이 확정된 것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폴에서 개최될 미-북 정상회담에서 영구적인 핵 폐기,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가 합의된다면 자유한국당은 환영할 것이다.”

핵 폐기를 전제로 한 환영 논평이지만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근거가 있을까요? 의심이라는 단어를 쓴 것으로 미루어 역시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홍준표 대표는 11일 밤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띄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미정상회담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한다고 합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1973년 키신저와 레둑토의 파리 평화회담 재판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두 사람은 파리 평화회담의 공로로 세계를 기망하여 노벨평화상을 지명받았으나 그로부터 정확히 2년 후 베트남은 바로 공산화되고 수백만이 보트피플 되고 숙청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파리 평화회담으로 베트남이 공산화됐다는 주장은 최근 한반도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극우 성향 논객들이 주로 하는 주장입니다. 파리 평화회담과 한반도 평화협정은 ‘평화’라는 단어만 같을 뿐 역사적 배경과 맥락이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전형적인 견강부회입니다. 홍준표 대표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상합니다. 이런 비상식적 주장 때문에 자유한국당 지지도는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첫째, 야당의 반대 본능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지방선거 때문일 것입니다.

‘야당은 반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독선과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야당은 정부·여당을 비판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에는 한 가지 금도가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을 국민의 절대다수가 찬성하는 경우 야당은 입을 꾹 다물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여당과 야당이 역할분담이 절대다수의 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런 원리를 증명할 수 있는 전례가 있습니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3년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김 대통령의 개혁 업적 중에는 군부의 파벌을 정리한 것과 금융 실명제를 실시한 것이 제일 돋보입니다. 김 대통령이 잘해야 ‘양 김 퇴진’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발 성공하길 바랍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 초기 개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신한국 창조’를 외쳤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 실명제 실시, 정치관계법 개정 등 잇단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군부의 정치 세력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국민들은 ‘문민의 정부라서 역시 다르다’며 이를 반겼다. 취임 초기 김 대통령의 인기는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집권 2년째인 1994년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김 대통령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으로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 말대로 김영삼 정부 취임 초기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에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대선 패배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런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야당의 반대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세계화’를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그 후유증으로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노동법 날치기로 국민의 분노를 자초했습니다.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정권교체는 그 결과였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이회창 회고록’ 출간기념회에서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이회창 회고록’ 출간기념회에서 회고록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반대의 전례도 있었습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회창 전 총재는 김대중 정부 취임 초기부터 정부·여당과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2017년 이회창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대선 패배 직후에는 담담하게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으나 그 후 김대중 정권이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이와 더불어 친북세력들이 발호하는 것을 보면서 대선 패배 책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와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많은 국민들 그리고 보수층이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싸움을 싫어하지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온몸을 던져 싸운다. 김대중 정권이 나를 법관 출신의 백면서생쯤으로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싸울 바에는 야만(?)스럽게라도 싸워서 김대중 정권이 스스로 야당 탄압이 자신들의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경투쟁은 9월 10일의 정기국회 개회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시작해 김대중 정권의 부당한 정계개편 시도 규탄투쟁을 하며 전국 규모로 확산해 가기로 했다.”

물론 이회창 총재가 김대중 정부와 전면전을 벌인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다수 민심의 지지를 받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친북’ 정책으로 파악한 것을 보면 이회창 총재의 안목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김대중 정부 5년 내내 ‘차기 대통령’처럼 행세했습니다. ‘이회창 대세론’ 덕분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은 진짜 차기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역사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청산과 금융 실명제 실시는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이었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에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가 전에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라는 뜻을 가진 당랑거철(螳螂拒轍)을 인용한 일이 있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에 맞서는 것이 바로 당랑거철입니다. 시대적 개혁 과제에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것이 야당의 지혜인 것입니다.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겨우 집권여당의 선거용 전술로 읽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모습이 보기에 딱했을까요? <조선일보>의 강천석 논설고문이 12일 치 칼럼에서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컨트롤하려면 달라진 상황을 부분적으로 수용(受容)해야 한다. 브란트 총리의 동방(東方)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그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적 독일 통일의 길을 닦았던 헬무트 콜 총리의 비전과 전략을 참고할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정파적 이해를 넘어서는 국가적 과제입니다. 박정희 노태우 전 대통령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여기에 맞서는 것은 자기 뿌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최근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최근 한반도 정세 변화는 문재인 대통령 혼자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문재인 대통령 혼자 이끌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방선거를 의식한 자유한국당의 색깔론 공세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위력이 없다. 자유한국당이 경제 쪽으로 공격 포인트를 이동시키면 논쟁할 지점이 많다. 우리도 방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지금 우리가 절대 유리한 곳에서 자꾸 싸움을 걸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여당 의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 대한민국 제1 야당의 현주소입니다. 어쩐지 좀 서글프지 않습니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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