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목도리를 두른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엷은 미소를 띤 채 21일 서울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우리나라에서 평창이 어디쯤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물며 세계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평창 동계올림픽을 영어로 쓸 때 Pyeongchang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중간에 대문자 C를 사용해서 PyeongChang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북한의 평양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슬로건은 ‘새로운 지평’(New Horizons)입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평창 동계올림픽의 ‘비전’을 “아시아라는 잠재력이 큰 새로운 무대에서 세계의 젊은 세대들이 함께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평창과 대한민국에 지속 가능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새 지평-전통문화와 세계문화가 융합하는 새로운 문화의 번영
환경적 새 지평-녹색성장을 선도할 환경과 산업 인프라 구축
공간적 새 지평-접경 지역이라는 국토의 막다른 골목에서 남북 및 세계가 소통하는 개방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국토 공간의 지평을 확대
경제적 새 지평-1차 산업과 단순 3차 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혁신함으로써 개최 도시를 국가 경제의 새로운 축으로 형성
네 가지 새 지평 가운데 ‘공간적 새 지평’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평창은 분단국가의 접경 지역입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평창이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이 지정학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냉전 시대 유물인 분단국가의 휴전선 인근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스포츠 행사는 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011년 유치 이후 끊임없이 평창 동계올림픽과 함께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 남북단일팀 구성, 한반도 대화국면 조성의 계기 등에 관심이 쏠린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2011년 이후에도 핵 및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렸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미국도 이런 북한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8년 신년사에서 대화를 제의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예상대로 김정은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혔습니다. 저는 “시기적으로 늦은 것 아닌가”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남북이 대치 국면에서 대화국면으로 넘어가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대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신뢰를 확인해야 합니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 결과 및 평창겨울올림픽 관련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대형 한반도기를 흔들며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환영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한 박정희 정부가 그랬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맺을 때 노태우 정부도 그랬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2000년 김대중 정부와 2007년 노무현 정부도 물론 그랬습니다. 사전 준비 없이 대화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판이 깨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평창 동계올림픽을 고리로 남북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북한이 겨우 5개 종목 22명의 선수를 참가시키기로 했습니다. 상징적 수준의 규모에 불과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말 많던 여자 아이스하키는 12명이 같이 훈련하고 3명이 경기에 뛰기로 했지만,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한 비판은 여전합니다.
북한의 공연에 대한 시각도 싸늘합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로 나빠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로 보는 여론이 많습니다. 혹시 공연장에서 돌발 사고가 터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다가 모처럼 조성된 대화국면이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는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문화행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심하게 흔들리는 판 위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는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북한에 대한 남한 민심의 악화입니다.
북한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여섯 차례 핵실험을 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북한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이 꽤 많았습니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미국의 압박으로 붕괴 위기에 처한 북한을 우리가 잘 달래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의 회담은 우리나라 안에서 햇볕정책 찬성 여론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6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실험은 북한에 대한 남한 내부의 동정 여론이 점차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민심은 갈수록 악화했습니다.
거기다가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의 뒤를 이어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하면서 북한에 대한 남한 민심은 더욱더 나빠졌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철없는 독재자’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장성택 처형, 김정남 살해 사건 등이 그런 이미지를 사실로 입증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이처럼 악화한 것은 한반도 정세에서 ‘생태계의 변화’로 비유할 수 있을 만큼 큰 정치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따라서 어떤 정치인도 국민의 지지 없이 북한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과 남북 대화를 둘러싼 혼선과 갈등은 남과 북의 분단 기득권 세력이 ‘생태계의 변화’를 정확히 읽지 못한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이 9일 오전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과 전체 회의 시작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판문점/사진공동취재단
첫째, 북한의 오만과 편견입니다. 북한은 독재국가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과 미사일 개발로 자신이 미국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남한쯤이야 자신이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재자의 이런 인식은 남북 대화에 나선 대표단의 표정과 언행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한에 대화를 “해 준다”고 선심을 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번 기회에 공연단과 시범단, 응원단을 내려보내 남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공연과 응원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것 같습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사실 북한 사람들의 이런 편견은 폐쇄 사회에서 길든 일종의 고질이기도 합니다.
저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취재기자로 평양에 간 일이 있습니다. 북한 사람 여럿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신을 희극 배우라고 소개한 여성은 북한이 예술인을 얼마나 우대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눈을 반짝이며 끝없는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남한이나 해외 물정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은 남쪽에서 온 손님들에게 새로운 음식의 재료를 자랑하며 “맛이 어떠냐”고 자꾸 물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이런 음식 못 먹어봤지?’라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며칠 뒤 평양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양 랭면 맛이 어떠냐. 얼마든지 드릴 테니 더 드시라”고 계속 말을 붙이는 복무원들 때문에 냉면을 제대로 먹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는 고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양에서 제가 만난 북한 고위층은 대부분 아랫사람에게 거들먹거렸습니다. 반대로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굽신거렸습니다. 관료주의가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의 이런 체질은 쉽사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르고 남북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계속 걸림돌로 작용할 것입니다.
둘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 집권으로 궁지에 몰린 보수 기득권 세력의 초조감입니다. 자유한국당의 장제원 수석대변인이 20일 이런 성명을 냈습니다. 남북 선수단이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한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직후입니다.
문재인 정권의 ‘평양올림픽’ 선언을 국민과 함께 규탄합니다.
오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발표는 문재인 정권이 북한의 김정은 체제를 위해 집요하게 IOC를 설득한 결과입니다. 결국, 문재인 정권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자진 반납하고 ‘평양올림픽’을 선언한 것입니다.
끝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에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도 애국가도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IOC를 설득했다면 착각이고, 북한을 위해 IOC를 설득했다면 반역입니다. 이제 ‘평양올림픽’에는 김정은 체제 선전가만 울려 퍼질 겁니다.
순수해야 할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정치논리로 얼룩지고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은 성공적 평화올림픽을 개최한 지도자로 포장될 것입니다. 문재인 정권은 국민들의 상실감 따위는 아랑곳없이 전매특허인 ‘정치 쇼’로 자화자찬에 혈안이 되어 문재인 찬양가를 불러댈 것입니다.
시한부 평화도 잠시, 북한이 핵을 완성하고 완성된 핵과 미사일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향해 도발과 협박을 본격화한다면 문재인 정권은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두고 벌이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어설픈 올림픽 도박에 국민들은 한숨과 탄식 속에 심각한 우려를 하고 계심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어떻습니까?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지고 있는 남북 대화 국면에 저주를 퍼붓는 것 같습니다. 반북선동입니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태도는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 대해 나빠져 있는 국내 여론에 기름을 붓는 행위입니다.
자유한국당은 왜 이러는 것일까요? 6·13 지방선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자유한국당은 6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정당 지지도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워낙 심하게 밀리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보수 세력을 결집해 정당 지지도를 끌어올리려면 색깔론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좌파’ ‘친북’으로 몰고 보수를 결집하기 위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태도는 물론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의 정통성을 자부하는 정당에서 결코 채택해서는 안 되는 선거 전술입니다. 겨우 한 차례의 지방선거에서 지지 않기 위해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대화국면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자유한국당 당사에 사진이 걸려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한에 보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끌어낸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로 이어졌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에 유치한 행사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전이 벌어진 2011년 7월 남아공을 방문했습니다. 발표 직전 외신과 이런 내용으로 인터뷰했습니다.
에이피 통신 :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늘 북한 문제에 대해 궁금해하는 여론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이명박 대통령 : IOC 위원 대부분이 그 점에 대해 잘 이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큰 스포츠 행사를 치를 때마다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한다면 한반도 평화에 더욱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를 개최했는데, 세계 유수의 정상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이러한 국제 행사나 스포츠 대회 때 북한 리스크라고 하는 것이 과거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19일 오후 제주시 용담동 미래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제주도당 신년인사회에서 홍준표 대표와 제주도당 당직자들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2011년 7월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직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서 “우리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했고 거기가 접적 지역이니까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냐”고 건의한 일이 있습니다.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의 최근 반북선동은 자신의 뿌리와 과거를 부정하는 일종의 ‘정신분열’과 같은 것입니다.
자유한국당의 반북 정서 부추기기가 선거 전술로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비롯해 20% 정도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자유한국당의 이런 주장에 동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30% 정도의 합리적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자유한국당의 주장에 찬성할까요? 저는 찬성하지 않으리라고 전망합니다. 결과는 6월 13일 밤에 드러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한국당의 이런 태도가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에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당국자들이 북한 당국자들과 회담을 할 때 야당의 이런 주장을 핑계로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여자 아이스하키팀에 대해 실언을 했다가 사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우리 국민의 민심이 얼마나 악화되어 있는지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
어쨌든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남북대화 국면이 첫 고비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예술단 공연 사전점검을 위해 내려왔습니다. 북한의 공연과 응원에 넋이 나가서 갑자기 북한을 좋아하게 될 우리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 차분해야 합니다. 북한은 모처럼 열린 대화 국면을 진지한 자세로 이어가야 합니다. 남한을 속이려 들면 안 됩니다. 남한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체제보장도 평화협정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유한국당도 무책임한 반북선동을 중단해야 합니다. 색깔론에 결집할 보수세력은 이제 별로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지혜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어준 남북대화의 기회를 잘 살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평창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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