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사자성어로 보는 2017년 정치
<교수신문>이 올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사악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선정했다.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촛불을 통해 출범한 새 정부가 적폐청산에 나선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교수신문의 올해의 사자성어는 대체로 그해 한국 사회의 화두를 압축해 보여줬다. 정치권 역시 현안에 대한 입장이나 주장을 사자성어로 압축해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탄핵으로 8개월 일찍 대선을 치른 정치권도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역동적인 한 해를 보냈다. 2017년 정치권을 설명하는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의 ‘재조산하’를 자주 언급했다. 대선 전인 올해 초 신년 화두를 제시하는 사자성어로 이 말을 꼽았고, 지난 추석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방명록에 “재조산하와 징비(懲毖) 정신을 되새깁니다”라고 적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다시 세우려던 류성룡과 이순신의 정신을 기리겠다는 의지다. 대선 기간 문 대통령이 사용했던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도 여기서 나왔다.
“이게 나라냐”는 촛불의 목소리에 응답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국가정보원·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의혹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범죄’와 ‘적폐’에 칼을 뽑아 들었다. 추미애 대표·우원식 원내대표가 이끈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에서 ‘개혁입법’을 처리를 위해 야당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적폐청산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으로 반발하고 있고, 여당이 ‘개혁입법’이라고 이름 붙인 주요 법안들은 ‘여소야대’라는 한계와 116석의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부딪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재조산하’는 2018년에도 말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까?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몸을 씻는다”는 즐풍목우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즐겨 쓰는 말이다. 그는 지난 2월 ‘성완종 리스트’사건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에도 “지난 35년간 즐풍목우의 자세로 오로지 국민과 국가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해왔다“고, 4월 대통령선거 후보자 방송연설에서 “22년 정치인생을 즐풍목우의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당 대표 당선 뒤인 7월4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서도 방명록에 이 말을 다시 썼다. 당 대표실에도 즐풍목우 네 글자를 액자로 걸어놨다.
‘장자’의 <천하>편에 나오는 즐풍목우는 홍수를 막는데 궂은일을 마다치 않은 중국 고대의 현군 우임금을 평가하는 말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긴 세월 이리저리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 해 노력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자세로 인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원한 비주류’였던 그가 대선 후보와 자유한국당 대표에 오른 과정만 보면 일견 ‘즐풍목우’에 견줄만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추락한 자유한국당도 ‘춥고 배고픈’ 야당 생활을 실감하고 있다. 또 박 전 대통령을 출당 조치하고, 국정농단의 ‘공범자’인 당내 친박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등 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이 고생을 감내하고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는 흐릿하다. 홍 대표가 25일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현장을 찾아 “이 정부가 정치보복과 정권을 잡았다는 축제에 바빠 소방점검을 전혀 안 했을 것”이라며 정치 공세를 펴는 등 제1야당은 보수의 재정립이나 혁신보다 정부 여당을 공격하는 ‘말폭탄’의 강도만 높이고 있다. ‘무너진 보수’는 2018년에는 제 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한편, 홍 대표는 최근 당 대표실의 액자를 즐풍목우에서 승풍파랑(乘風破浪)으로 교체했다. 홍 대표는 “질곡과 고통의 세월은 가고 이제는 한마음으로 큰 바다를 헤쳐나가는 새해가 되자”는 의미에서 승풍파랑(乘風破浪)으로 바꿔 달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척당불기(倜儻不羈)’라는 사자성어로 논란에 오르고 있기도 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돈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던 홍 대표는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의 “돈을 전달하던 그 날 홍준표 의원실에서 액자인지 족자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척당불기’란 한자를 봤다”는 진술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재판에서 홍 대표의 변호인은 윤 전 부사장의 진술에 대해 “‘척당불기' 액자는 한나라당 대표가 된 뒤 대표실에 걸어 뒀던 것으로, 의원실에는 걸어 둔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최근 과거 의원실에도 ‘척당불기’ 액자가 걸려있던 영상이 공개되며 온라인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사이가 나쁜 사람이 공통의 곤란을 당하여 서로 협력한다”는 뜻의 ‘오월동주’는 우리 정치권을 대표하는 말 중에 하나다. 특히 올해는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이 오월동주의 ‘아이콘’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동참한 그는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을 탈당하고 사이가 냉랭한 것으로 알려진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와 함께 1월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애초 ‘반기문 대통령’을 꿈꾼 김 의원과, 독자 생존에 무게를 뒀던 유 대표의 항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9월10일 두 사람이 입맞춤하는 모습까지 연출하며 이별을 유예하는 데 안간힘을 썼지만, 김 의원은 지난 11월9일 끝내 자유한국당 복당을 택했다. 그는 다시 사이가 원만치 않은 홍준표 대표와 한 배를 탔다. 당내 ‘친박(친박근혜)’ 맞서기 위한 ‘임시 연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교섭단체의 설움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유 대표와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결국 한배를 타기로 했다. 대북제재와 압박을 주장하는 등 국방·안보 분야에서 강경보수의 목소리를 내온 유 대표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화해·포용 정신을 계승하겠다던 안 대표의 화학적 결합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전망됐지만 두 사람 모두 눈앞의 위기 앞에서 손을 잡았다. 통합 추진과 함께 안 대표 역시 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을 탈당한 뒤 오월동주에 나섰던 박지원·천정배·정동영 의원 등 호남 의원들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정치권에 ‘오월동주’의 바람이 더욱 거세질지 주목된다.
올해 우리 외교와 국방·안보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박근혜 정부가 남겨놓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과의 갈등이 불거지며 골머리를 썩이는 가운데,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핵실험 도발은 새 정부의 운신의 폭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주무부처인 국방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의 입과 행보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계속된 ‘돌출발언’으로 청와대와 여당에서도 지탄을 받았다. 송 장관은 지난 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미국 일각에서 강도 높은 대북제재 수단으로 거론된 ‘해상봉쇄’ 조치와 관련한 여야 의원들의 질의에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논의에서 정부가 해상봉쇄에 참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것처럼 답해 논란이 됐다.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해상봉쇄라는 부분이 언급된 바가 없고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 않다”는 청와대의 입장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11월에는 국군 사이버사령부에 ‘댓글 공작’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됐던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의 석방에 대해 “참 다행이다”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고,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 특임교수를 “학자 입장에서 떠드는…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탈북 병사 사건으로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한 자리에선 “미니스커트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며 자신의 역할과 상관없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의 근언신행이라는 사자성어는 2018년에도 우리 외교와 국방·안보 분야에서 새겨야 할 ‘금언’이 될 것 같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그래픽_장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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