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8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구치감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장면 1)
서울의 기자가 대구에 출장 가서 택시를 탔습니다. 라디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택시 기사가 혼잣말처럼 욕을 하고 혀를 찼습니다.
“가시나 저거 지 애비 망신 다 시키고! 에잇! 쯧쯧!”
기자가 서울말씨로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창피한 일이지요.”
택시 기사가 버럭 화를 냈습니다.
“뭐가 그럽니꺼. 박근혜가 뭘 잘못했습니꺼!”
택시 기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한 기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장면 2)
인터뷰에서 기자가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에게 물었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자신은 대구에서 4선을 했지만 지역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며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지원 의원의 얼굴이 벌게졌습니다.
“저도 4선 의원이지만 호남 지역주의에 매몰되지 않았어요. 매몰돼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정치는 홈그라운드가 있으니 거기서 외연을 확대해 집권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호남만 가지고는 안 된다, 호남을 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제이도 ‘동진정책’을 했어요. 유승민 의원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유승민 의원도 그렇게 밤낮 대구에만 매몰되지 말고 과감하게 호남에 진출해 주는 것이 좋다, 그렇게 봅니다.”
인터뷰에서 기자가 유승민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와 호남 중진 의원과의 갈등이 심한 것 같습니다. 바른정당과 통합이 잘 될까요?”
유승민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역시 대구에서 4선을 했습니다. 국민의당에는 호남 지역구 의원이 스물세분 계십니다. 개혁연대를 제대로 하려면 영남이든 호남이든 케케묵은 과거의 지역주의를 탈피해야 합니다. 묘하게 박지원 전 대표 같은 분이 저의 지역주의 극복과 탈피를 ‘호남 배제’라고 말을 비틀어서 오히려 호남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구태를 보였습니다. 그게 국민의당 내분의 한 원인입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국민의당 박지원·천정배·정동영 의원과 같이 정치를 할 수 있나요?”
유승민 의원이 대답했습니다.
“특정 정치인 이름을 들어서 말하기는 싫습니다. 저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봅니다.”
기자가 말을 끊었습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말과 행동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유승민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정당은 생각과 가치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너무 다르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11월16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도민과 함께 희망 경남 만들기’에서 연설하는 동안 홍준표 경남도지사 후보가 경청하고 있다. 창원/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
장면 3)
홍준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하고 일주일 뒤 대구 언론인 포럼에 참석했습니다. 당 홈페이지에 발언록이 있습니다.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지금 대구시민이나 경북도민들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사랑하고 지지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구속까지 된 모습을 보면서 대구시민이나 경북도민들이 얼마나 안타깝고 상실함이 컸겠는가?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출당 문제 때문에 저와 저희 당에 대해서 서운한 생각까지 가진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보수우파 전체가 궤멸할 상황이고 정권은 갈수록 한국 보수를 말살하기 위해 잔인한 정치보복과 좌파 독주를 계속하고 있다. 보수우파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산업화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발전하는데 선도해왔고 이 땅의 문민정부를 창출시킨 그런 세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보수우파 세력들은 국민의 냉정한 시선 속에 좌파 독주를 넋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실패한 과거와 깨끗하게 단절하고 혁신과 통합으로 보수우파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우리 당도 이제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 나라는 어찌 되겠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당한 처분을 막는 것도 우리 보수우파가 힘을 얻어야지 가능하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 쏟아진 일부 비난을 받을 생각을 하고 아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 여러분들께서 저의 충정을 잘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다.”
인터뷰에서 기자가 유승민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홍준표 대표가 대구를 자유한국당의 보루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승민 대표의 호흡이 거칠어졌습니다.
“홍준표 대표나 자유한국당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대구·경북이 찍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시·도민을 모욕하는 처사에요. 민심은 저와 바른정당에도 차갑고 비판적이지만 세대별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유승민 대표가 대구시장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나요?”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장이나 도지사를 2~3년 하고 던지고 대선에 도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서울시장 출마는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드렸고요.”
다그쳤습니다.
“대구는요?”
그는 조심스럽게 답변했습니다.
“당이 워낙 어려운 상황이니 일단 좋은 사람을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홍준표 대표의 자유한국당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 위해 자신의 대구시장 직접 출마 가능성도 열어 놓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가 지난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TV>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통령 5명 배출한 TK, 박근혜 탄핵으로 자존심 상해
티케이(대구·경북)는 우리나라 정치에서 매우 특이한 지역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다섯 사람이 티케이 출신입니다. 집권기간을 모두 합치면 40년쯤 됩니다. 다른 지역 출신 대통령 재임 기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긴 기간입니다.
티케이의 명문 경북고 출신들은 한때 우리나라 정관계에서 서울의 명문고 출신들보다 훨씬 잘 나갔습니다. 구수한 티케이 사투리는 정관계의 표준말처럼 통했습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주류’는 확실히 티케이였습니다.
그랬던 티케이가 체면을 확 구겼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입니다. 티케이 지역은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습니다. 대구는 박근혜 후보가 80.14%를, 경북은 박근혜 후보가 80.82%를 득표했습니다. 그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했습니다. 티케이의 자존심에 금이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 심리는 참 묘한 것입니다. 탄핵 이후 티케이 사람들끼리 모이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욕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욕하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못난 자식이라도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부모가 견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에서 들었던 대구의 택시 기사 사례는 어쩌면 그리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5·9 대선에서 티케이의 이런 심리를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대선 직전 서청원·최경환·윤상현 등 친박의원들에 대한 당원권 정지 징계를 해제했습니다. 선거 유세에서는 ‘박근혜 동정론’을 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자체가 부당하고 탄핵당한 대통령을 구속하는 것은 정치재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티케이 민심은 이런 홍준표 후보에게 화답했습니다. 5·9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이긴 지역은 대구와 경북, 그리고 홍준표 후보가 지사를 지낸 경남이었습니다.
대구의 후보별 득표는 문재인 342,620(21.76%) 홍준표 714,205(45.36%) 안철수 235,757(14.97%) 유승민 198,459(12.60%) 심상정 74,440(4.72%)이었습니다. 경북은 문재인 369,726(21.73%) 홍준표 827,237(48.62%) 안철수 253,905(14.92%) 유승민 149,017(8.75%) 심상정 88,080(5.17%)이었습니다. 대구와 경북에서 홍준표 후보가 얻은 표는 문재인 후보의 두 배를 훨씬 넘었습니다.
지방선거 다가오자 TK 민심 쟁탈전 점화
지역별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인과 정당의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대선은 끝났지만 티케이 민심을 잡으려는 각 정당의 각축이 다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구 출신 김부겸 의원을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하고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 과감하게 대입 수능을 연기했습니다. 티케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듯한 태도입니다.
홍준표 대표는 티케이 지역을 자유한국당 재건의 디딤돌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티케이 출신임을 강조하며 대구 당협위원장을 맡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대표는 이런 홍준표 대표에게 티케이 지역을 내줄 수 없다며 티케이 유권자들의 자존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티케이 민심은 이제 어디로 갈까요?
우리나라 정치에서 지역갈등 구조를 분석할 때 조심해야 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 정치인과 유권자를 가급적 분리해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역 정서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것은 대개 그 지역 출신 정치인들입니다. 지역 유권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둘째,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남은 오랫동안 지역주의 피해 지역이었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가해 지역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썼습니다. 반대로 대구·경북은 오랫동안 지역주의의 가해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정권을 놓치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전례가 있습니다. 티케이 출신 정관계 인사들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을 모두 합쳐서 ‘잃어버린 15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이 권력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티케이는 이 기간에 대통령과 집권여당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저항은 선거에서 티케이 지역 표심으로 나타났습니다. 1996년 총선에서 대구에서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돌풍이 불었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 티케이 지역은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줬습니다. 2004년 총선, 2006년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티케이 전성시대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티케이는 정·관계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9년 뒤 정권을 다시 놓쳤습니다. 순서로 보면 이제 또 강력히 저항할 차례입니다.
최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통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역주의 논쟁도 티케이의 독특한 지역 정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티케이 정치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호남 정치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대표가 박지원·천정배·정동영 등 국민의당 호남 중진들에게 거부감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유승민 대표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티케이 지역 정서 때문은 아닐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을 하면서 이런 티케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티케이 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을 기용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직접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티케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29명의 사망자를 낸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TK 민심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티케이 민심은 복잡하면서도 까칠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티케이 민심은 이제 어디로 갈까요?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의 주요 관전 포인트 가운데 ‘티케이 목장의 결투’가 있습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신만만한 것 같습니다. 보수의 근거지인 티케이 지역에서 유승민 대표의 바른정당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대표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태생적으로 대구·경북은 보수, 광주·전남은 진보라는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티케이 출신 대통령이 많다 보니 대구·경북은 보수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했거나 해방 이후 진보적 운동을 한 분들이 굉장히 많다.”
“양 지역이 선거 때만 되면 한 쪽에 몰표를 주고 정치인들은 지역주의를 선동한다. 그런데 대구는 1인당 지역 내 총생산(GRDP)이 20년 넘게 꼴찌고, 광주는 꼴찌에서 두 번째다. 일방적으로 표를 몰아주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 두 도시가 먹고살기는 그리 힘들다. (보수·진보 구분) 의식을 대구·경북·광주·전남이 깨부셔야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한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당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티케이 지역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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