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173
문재인 대통령 추도사 비교
YS ‘민주화의 주역’으로 애정어린 평가
DJ ‘외환위기 극복’-‘한반도 평화’ 극찬
개혁·리더십·통찰력·지혜 승계해야 성공
문재인 대통령 추도사 비교
YS ‘민주화의 주역’으로 애정어린 평가
DJ ‘외환위기 극복’-‘한반도 평화’ 극찬
개혁·리더십·통찰력·지혜 승계해야 성공
우리나라 대통령은 많지 않습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까지 12명이 전부입니다. 대통령에게는 대통령만 아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고, 대통령만 아는 고통과 고독이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롤 모델’이나 ‘멘토’가 대통령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세 사람의 ‘롤 모델’이 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세 전직 대통령은 재직 순서와는 반대의 순서로 서거했습니다. 서거일도 노무현 5월, 김대중 8월, 김영삼 11월로 재직의 역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순으로 전직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일심동체였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엮여 있습니다. 노무현이 있었기에 문재인이 있었고, 문재인이 있었기에 노무현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전에서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문재인이 성공하면 노무현이 성공하는 것이고 문재인이 실패하면 노무현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떨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잘 알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매우 오랫동안 정치를 한 대중 정치인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2002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활동하던 변호사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쓴 여러 권의 책을 찾아봐도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먼 훗날 역사는 문재인 대통령을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교해서 평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11월 22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도식에 참석했습니다. 추도사의 주요 내용은 언론에 이미 소개됐습니다. 여기서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15년 11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조문하고 “이 땅의 민주화 역사를 만들다 시피하셨는데”라고 말해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습니다.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합당으로 민주세력을 ‘배신’한 정치인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총재와 야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재직 중에는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을 부도냈습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상당한 애정을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러고 보니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고향 선배입니다. 두 사람은 거제가 고향입니다. 또 경남중고 동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의외로 자신의 출신 지역과 출신 학교에 애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경희대 출신 기자가 경희대 출신 의원과 기자들 모임에 갔다가 문재인 의원이 참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일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한 가지 무척 닮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돌파력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외치며 정면돌파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적 위기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밀어붙여 2016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취임 초기에 강력한 개혁몰이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도 참석했습니다. 추도식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렸습니다. 추도사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떻습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 추도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 추도사가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사에는 존경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정비서관이 될 뻔한 인연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맡았던 김성재 교수가 당시 문재인 변호사에게 민정비서관을 맡아달라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때는 그 일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고사했다”고 책에 써 놓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어려워했습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고향도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다가 노무현 정부 초기의 대북송금 특검 사건이 있었습니다. 2011년 <운명>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여움과 문재인 대통령의 당혹감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대한민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와이에스, 디제이와 정치적으로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소신과 강한 리더십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갖고 있던 한반도 정세에 대한 통찰력과 지혜를 고스란히 승계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러 가지 문제도 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재임했던 10년 동안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비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역 갈등은 오히려 격화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들입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친인척이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영호남 지역 갈등은 과거보다 현저히 누그러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더 성공한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문재인 대통령이 5월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추도식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1954년 5월 남해의 푸른 섬 거제도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민주주의와 역사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그 답을 찾아 담대한 여정에 나섰습니다.”
“1970년대에는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강력한 야당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깃발을 더 높이 들었고, YH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했으며 1979년 10월 유신정권으로부터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촉발된 부마 민주항쟁은 결국 유신정권을 몰락시켰습니다.”
“1980년대 김영삼 대통령님의 민주화 투쟁은 5·18 광주 민주항쟁과 함께 다시 불타올랐습니다. 광주 민주항쟁 3주기에 시작한 단식은 23일간 목숨을 걸고 계속되었습니다. 이 땅에 다시 드리워진 독재의 어둠을 깨치고, 민주주의의 새벽을 불러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님은 19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독재 권력과 맞서 온몸으로 민주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거제도의 젊은 초선의원은 ‘바른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40여 년의 민주화 여정을 거쳐 도달한 곳은 군사독재의 끝, 문민정부였습니다.”
“문민정부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남긴 가치와 의미는 결코 폄하되거나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4·19 혁명과 부마 민주항쟁, 광주 민주항쟁, 6월항쟁이 역사에서 제 자리를 찾았던 때가 바로 문민정부입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취임 후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13일 발표한 담화문에서, ‘문민정부의 출범과 그 개혁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문민정부를 넘어 이 땅의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법과 정의에 기초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군사독재시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도 이루어졌습니다. 군의 사조직을 척결하고, 광주학살의 책임자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경제정의의 출발이었습니다. 신속했던 개혁의 원동력은 민주화와 함께 커진 국민의 역량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께서 연 문민시대는 민주주의를 상식으로 여기는 세대를 길러냈습니다. 권력의 부당한 강요와 명령에 맞서고 정의롭지 못한 정치를 거부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늘어났습니다. 문민정부 이후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문민정부가 연 민주주의의 지평 속에서 대통령님이 남기신 ‘통합’과 ‘화합’이라는 마지막 유훈을 되새깁니다. 대통령님이 말씀하신 대로, 대한민국을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국민의 화합과 통합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2007년 3월16 일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취임 인사차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 전 대통령이 닭장차(압송용 경찰차)도 탔고 그게 결국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40대 기수론, 김대중 후보 할 때 부산 공설운동장 김대중 지지연설 할 때 김대중 승리는 나의 승리고 이렇게 말할 때 그게 굉장했다. 그때 그것은 부산 시민들이 김대중 많이 지지했다.”
“저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각오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20년 전, 전대미문의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했던 김대중 대통령님의 심정도 같았을 것입니다.”
“1998년 취임 연설 중 국민의 고통을 말씀하시면서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 또렷합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배어 나오는 그 모습에 국민도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통령님을 믿고 단합했습니다. 나랏빚 갚는데 보태라며 아이 돌반지까지 내놓은 국민의 애국심과 뼈를 깎는 개혁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대통령님은 벼랑 끝 경제를 살리는 데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햇볕정책을 통해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갔습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으로 남북 화해협력의 빛나는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두 번에 걸친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분도 김대중 대통령님입니다. 대통령님은, 안보는 안보대로 철통같이 강화하고 평화는 평화대로 확고하게 다지는 지혜와 결단력을 발휘했습니다.”
“이후 참여정부가 끝날 때까지 남북 간에 단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평화가 지켜졌습니다. 우리의 외교·안보 상황이 다시 엄중해진 지금, 저는 김대중 대통령님의 영전과 자랑스러운 민주정부의 전통 앞에서 다짐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보여주신 통일을 향한 담대한 비전과 실사구시의 정신, 안보와 평화에 대한 결연한 의지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갈 것입니다.”
“나아가, 평화를 지키는 안보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 안보로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 번영을 이뤄가겠습니다. 국민통합과 적폐청산,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의 과제도 민주정부의 자부심, 책임감으로 온 힘을 다해 해결할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말이 생각납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발전하는 역사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항상 기억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8년 1월1일 오전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새해 인사를 온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문제로 김대중 대통령이나 동교동 측에선 꽤 오랜 시간 서운해했다. 내가 나중에 시민사회수석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김 대통령께서는 내게 섭섭함을 토로하셨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의도와 진정성을 설명드렸다. 나중에는 대체로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노 대통령의 판단과 결정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소관부서인 민정수석실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고려 요소들을 소상하게 보고 드린 것이 민정수석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때 노 대통령의 결정이 혹시 잘못된 결정이었다 해도, 그 책임은 대통령이 아니라 민정수석이었던 내게 있다. 내가 보좌를 잘못한 탓이다. 민정수석실이 그 문제의 소관부서가 된 것은 기본이 법률문제였기 때문인데, 사실은 엄청난 고도의 정치문제였다. 정치영역에서의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했던 일이었다. 참 어려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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