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개헌특위, 정부형태 두고 교착 상태
시민사회, ‘국민개헌 공론화위원회’ 제안
“국회 개헌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 구성”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국회 본회의 상정에 따른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문재인 대통령은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헌은 국민의 뜻을 받드는 일입니다. 변화한 시대에 맞게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해야 합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합니다. 개헌은 내용에 있어서도,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와 의사가 반영되는 국민개헌이어야 합니다. 국민주권을 보장하고 정치를 개혁하는 개헌이어야 합니다.
저는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를 놓친다면 국민들이 개헌에 뜻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에서 일정을 헤아려 개헌을 논의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개헌과 함께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의 개편도 여야 합의로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으로 새로운 국가의 틀이 완성되길 기대하며 정부도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개헌에 대한 언급은 종전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이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10월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시민참여단은 반대 의견을 경청하고 배려하며 통합과 상생의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정치의 변화를 주도해 왔습니다. 지금도 국민들은 정치의 혁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삶을 바꾸는 정치를 요구하며 스스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권이 국민의 의지를 받들어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 정치가 뒤처지지 않고 협력하여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내년도 예산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에 따른 시정연설을 한 뒤 국회를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 당부에 이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와 정치 혁신 얘기를 꺼낸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혹시 국회 개헌 논의가 계속 지지부진하면 개헌도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논의해보자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이렇게 추정하는 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국민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국가 주요정책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새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론화위원회의 성공에 유난히 반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헌을 추진하는 시민단체입니다.
10월31일 국회에서 특이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개헌의 아킬레스건 정부형태, 국민개헌 공론화위원회가 대안인가’라는 어려운 제목입니다.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이상수), 대화문화아카데미(강대인), 주권자전국회의(문국주),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이기우) 등 4개 단체가 주최했습니다.
토론회 제목을 잘 살펴보면 토론회의 핵심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회 개헌특위에서 논의 중인 개헌은 여야가 권력구조에 대한 의견을 모으지 못해 교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뜻을 모았지만, 여당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야당은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는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제냐, 이원집정부제냐 정부형태가 개헌을 가로막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공론화위원회 방식으로 풀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해 보자는 토론회인 셈입니다.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 이상수 대표간사의 발제문에 제안의 핵심 내용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낡은 87년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헌정체제를 수립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형태 등 핵심적인 쟁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아, 사실상 개헌작업이 힘을 잃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로 가면 과연 내년 지방선거 시까지 개헌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국회의원과 소수 전문가 중심의 현재의 논의구조는 한계에 도달하였다. 국회 개헌특위는 여·야 정파 간의 협상장에 불과하며, 산하 자문위는 전문가들의 폐쇄적인 담론장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와 정부는 촛불 시민혁명을 통해 드러난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개헌 논의구조를 과감하게 개방하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헌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되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는 다가올 시대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주인 되는 헌법을 만드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 참여에 기초하는 열린 논의구조를 새로이 도입하여 교착상태를 뛰어넘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한다.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에 준하는 국민개헌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국민참여 개헌작업을 실행해야 한다.”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시민참여단의 종합토론회 둘째날인 14일 오전 충남 천안 계성원에서 '발표자와 시민참여단의 질의·응답 시간'에 한 시민이 질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수 대표간사는 국회 개헌특위 산하에 공론화위원회를 두며 공론화위원회 위원은 국회 특위가 13명 내외로 선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 공론화위원회 산하에 일정 원칙에 따라 무작위로 추출된 국민배심원단 1000여명과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위원회 20여명을 두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국민배심원단은 전문가위원회로부터 설명과 자료를 받고 학습과 토론을 통해 주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의견을 도출합니다. 전문가위원회는 정보자료 제공, 설명, 질의에 대한 답변 등을 통해 국민배심원단의 학습과 논의 과정을 돕는 자문단(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와 함께 국회 등에 온라인 플랫폼으로 개헌 장터를 설치해 원하는 국민은 들어와 의견을 펼칠 수 있도록 하고, 국민배심원단도 그 논의 과정을 지켜보거나 익명으로 참여하게 하여, 상호 의견 교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공론화위원회 의제에 대해 이상수 대표간사는 정부형태, 사회적 기본권의 확충 범위, 지방 입법· 재정권의 확대 범위, 지역구 국회의원 수와 비례대표 의원 수의 조정 등을 예시했지만, 정부형태만 집중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공론화위원회의 활동 시기는 내년 6월 지방선거 국민투표를 목표로 한다면 11월 중에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부터 2018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공론화 과정을 거쳐 권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공동 발제를 한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민참여단의 규모에 대해 “오프라인 공론화라면 500명 규모, 온라인 공론화라면 1000명 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어느 경우든 성별, 지역별, 연령별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조사 결과를 반영하는 방안에 대해 은재호 연구위원은 “표본오차를 고려해 오차범위 밖의 의견은 무조건 반영하고 오차범위 안은 여야 합의를 통해 반영하는 방안과 공론조사의 장점을 활용해 오차범위 안이라면 1차, 2차, 3차 조사의 의견변화율과 방향에 따라 판정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제시했습니다.
이번 토론회에는 무려 11명의 지정 토론자가 참가했습니다. 1인당 5분씩 짧게 발언했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들답게 인상적인 내용이 많았습니다. 토론의 핵심 요지를 한두 줄씩 간추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 개헌 공론화위원회는 야당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실화를 위해서는 공론화위원회를 가급적 객관적으로 구성하고 의제를 줄이는 등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김원동 강원대 교수(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 : 선행조치가 필요하다. 국회가 여야의 정파적 이해를 넘어서 시민참여단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정치개혁에 대한 근본 성찰도 필요하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개헌특위 위원) : 분권형 대통령제를 전제로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느냐 대통령에게 임명권을 주느냐로 압축할 수 있다. 따라서 국회 구성원리인 선거법 개정 문제를 당연히 같이 논의해야 한다.
노익상 한국리서치 회장 : 국회에서 개헌이 안 될 것 같다. 대통령이 동의해도 차기 대통령에 유력한 사람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선거제도 변경은 더 어렵다.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
신좌섭 서울대 의대 교수(국제공인퍼실레이터) : 촛불집회는 총체적 혁신을 요구한 것이다. 개헌은 수십 년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 3개월의 공론화로 숙의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신중히 해야 한다.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공동대표 : 공론화위원회의 과제를 가급적 좁혀야 한다. 정부형태와 선거제도 두 개의 주제에 집중하는 공론화위원회가 좋을 것이다.
천정배 국민의당 의원(국회 개헌특위 위원) : 공론화위원회로 개헌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는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다. 개헌은 국민주권을 강화하고, 선거제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해야 한다. 내년 6월 개헌이 바람직하다.
이기우 지방분권개헌 국민행동 상임의장 : 개헌 국민발안제를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 공론화는 국무총리를 어떻게 선임할 것인지 단일주제로 하자. 국회가 안 하면 시민단체가 나서자.
이창희 재단법인 씨알 사무국장 : 3개월 숙의로 개헌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2019년 개헌을 약속하고 공론화위원회에서 합의하도록 하면 어떨까. 공론화위원회 구성을 야당이 동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만들어야 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대표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결정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 편향성을 배제하기 위해 전 과정을 공개하고 배심원단을 세심하게 구성해야 한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 권력구조 합의가 안 되면 기본권과 지방분권만이라도 바꾸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개헌을 하지 말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야당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반대하고 있다. 11월까지 국회에서 개헌 공론화위원회 설치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되, 어려우면 대통령에게 개헌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공론화위원장은 대통령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임명하면 좋을 것이다.
토론자들의 우려처럼 개헌 공론화위원회는 구성부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내년 6월 개헌 자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공론화위원회 구성에 찬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처럼 공론화 과정을 거쳐 개헌안을 마련한 뒤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개헌은 자유한국당이 찬성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론화 과정을 통해 개헌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의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