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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 대놓고 말했다…“난 기혼남성 보좌진이 필요해”

등록 2017-08-29 16:26수정 2017-08-30 10:16

정치BAR_국회 여성보좌진 6인의 ‘힘겨운’ 생존기
인턴비서 포함 여성 보좌진 31.9%
5급은 17%, 9급이 72.5%나 차지
하급자 수두룩한 ‘피라미드’ 구조

“남성 보좌진들 학연·지연 연대”
보좌진 인력시장 열릴때 서로 끌어줘
밤샘노동에 결혼·출산도 쉽지 않아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정면 보이는 이 가운데)과 보좌진이 28일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회의를 하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남 의원은 여성 보좌진(5명)을 남성 보좌진(4명)에 비해 많이 채용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정면 보이는 이 가운데)과 보좌진이 28일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회의를 하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남 의원은 여성 보좌진(5명)을 남성 보좌진(4명)에 비해 많이 채용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남자 바리스타, 남자 셰프들이 카페와 식당을 점령한 시대에도 여자에게 쟁반을 들게 하길 고집하는 곳이 있다. 시대보다 반걸음쯤 앞서가야 하지만, 여전히 반걸음 뒤처져 걸어오는 국회다. 국회 의원회관을 방문해 의원이나 보좌관과 면담을 요청하면 으레 음료를 내어오는 이들은 하급 여성 비서다. 가뭄에 콩 나듯 종종 이 ‘율법’을 비껴가는 의원실도 있지만, 여비서가 내방객의 다과를 챙기는 건 여의도에서는 정당을 넘어선 불문율에 가깝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각의 여성 비율 30% 약속 지키면서 청와대발 ‘유리천장 깨기’가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민의의 전당인 국회마저도 여전히 견고한 유리천장 아래 놓인 것이다. 마초들의 세계인 여의도 정치판에서 분투 중인 여야 여성 보좌진 6명에게 그들의 ‘생존기’를 들어봤다. (성별에 따른 의원실 내 불평등은 여야를 가리지 않기에 그들의 소속정당을 밝히지 않았다. )

“의원님은 결혼한 남자를 좋아해”

이틀씩 밤을 지샌 피로에 헛구역질도 참아가며 일하던 때가 있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일머리 없는 고참 비서관(5급)을 대신해 정책·일정을 도맡아 챙겼던 비서(6급) 시절이었다. 고참이 일을 그만둔 뒤, 승진을 앞둔 ㄱ비서(현재는 4급 보좌관)에게 ‘영감’(국회에서 의원을 일컫는 은어)은 말했다. “자네를 비서관으로 올려줘야 하는 게 맞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지역을 관리할 수 있는 나이 든 기혼 남자 보좌진이야.” 승진을 바라고 일한 것도 아니지만 충격이었다. ‘젊은 미혼 여성’이란 이유로 인사에서 물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어서다.

여성이란 이유로 승진 앞에서 물을 먹은 게 ㄱ보좌관만의 기억은 아니다. ㄴ보좌관은 “비서에서 비서관으로 ‘관’을 다는 것부터가 여성에게 더 높은 장벽”이라고 말했다. “비서관 자리에 면접을 보러 다니면 보좌진들이 대놓고 ‘남자가 편하다’고 말하더라”는 설명이다. 대놓고 ‘남성 선호’가 강한 국회에서 살아남아 최정상인 ‘4급’을 단 여성 보좌관은 전체 4급 보좌관의 5.9%(7월27일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596명 가운데 35명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의원이 4급 보좌관 몫 두 명을 모두 남자로 채용했고, 여성 비례대표인 정춘숙(더불어민주당)·김삼화(국민의당) 의원만 보좌관 두 자리에 여성을 선발했다.

국회의원은 통상 9명의 보좌진(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9급 비서 각 1명, 인턴 비서 2명)을 둘 수 있는데, 5급 비서관도 전체 594명 가운데 101명(17.0%)만 여성이다. 반면 9급 비서를 채우는 건 대개 여성이다. 9급 비서 302명 중 219명(72.5%)이 여성이다. 의원실 내 행정 업무를 주로 맡는 9급 비서는 특히 승진이 어려운 ‘붙박이’에 가깝다. 인턴 비서를 포함한 전체 보좌진의 성비를 보면 여성이 31.9%여서 언뜻 ‘양호’해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하후상박 구조인 셈이다. ㄷ비서관(5급)은 “상위 직급엔 남자만 뽑고 여자들은 9급 비서에 머물게 하는 건 여성을 하위 직급으로 소진하겠다는 발상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그나마 인턴 비서 외에 아예 여성 보좌진을 두지 않는 의원들도 있다. 곽상도·김선동·정진석·정유섭 의원 등 대부분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이다. 민주당에선 여성 의원인 인재근 의원이 인턴 비서 외에 여성 보좌진을 채용하지 않았다. 반면 여성계 출신인 국회 여성가족위원장 남인순 의원(민주당)과 김상희 의원(민주당) 등은 보좌진의 반 이상을 여성으로 구성했다.

국회 보좌진들이 자주 드나드는 페이스북 ‘여의도 옆 대나무숲’ 페이지에 여성 보좌진들이 올린 글엔 설움과 절망감이 묻어난다. “의원실 채용공고 낼 때 성별 무관이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공고를 보면 성별이 무관할 것 같은데 막상 알아보면 결국은 성별 유관이다. 능력이나 경력이 아니라 성별을 우선으로 보는 현실에 이제는 슬프지도 않다.” “우리 사무실 남자들은 설거지, 손님에게 차 내기. 이런 거 하면 뭐라도 떨어지나 봄. 저런 일 하나 못해서 매번 ‘여자 비서들’만 부르는지…. 비서관님, 비서관님 질의서도 하나 못 써서 제가 쓰잖아요.”

담배연대부터 골프연대까지…그들만의 네트워크

남녀 격차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로 여성 보좌진들은 남성 보좌진들의 끈끈한 인맥을 꼽았다. 학연·지연·파벌 등에 따라 밀어주고 당겨주는 남성 중심의 끼리끼리 문화에서 여성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총선 뒤 ‘보좌진 인력시장’이 열릴 때 이런 네트워크는 일자리 알선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승진도 주로 이때 이뤄진다. “남자 보좌관들은 학연, 고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면 시민사회, 캠프면 캠프, 어디서든 ‘형님-동생’하고 네트워크를 만들더라. 총선 끝나고 국회 개원할 때 남자들은 이렇게 형성된 패밀리를 몰고 다닌다.” ㄹ보좌관의 푸념이다. 집권 여당이 된 민주당에선 ‘청와대행’ 티켓도 주로 남자 보좌진들이 차지했다는 말이 나온다.

술자리, 흡연구역 등에서 오가는 따끈따끈한 정보들도 여성 보좌진들을 비껴간다. 국회 업무의 특성상 공식적인 정보만큼 이런 비공식적인 정보를 장악하는 것도 ‘능력’으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ㅁ보좌관은 “오죽하면 담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토로했다. “결정은 회의에서 해야 하는데 중요한 얘기들은 정작 회의 마치고 흡연구역 내 ‘담배연대’에서 오가더라. 커피 들고 따라가는 것도 한두번이지.”

국회 보좌진 권익 보호와 인적 네트워크의 기반인 각 당내 ‘보좌진협의회’ 임원진 구성에서도 “여성은 액세서리일 뿐”이라고 여성 보좌진들은 입을 모았다. 현실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ㄷ비서관은 “민주당보좌진협의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은 남자 보좌진들이 주거니 받거니 승계해왔고, 여자 보좌진들은 감사 같은 자리에 들러리를 세울 뿐”이라고 전했다. 신생 정당인 바른정당의 경우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해 보좌진협의회의 수석부회장을 남녀 각 1명으로 뒀다.

‘술자리 네트워크’는 의원회관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대관팀이나 피감기관을 상대할 때도 남녀 차는 확연하다. 술을 못 마시는 ㄱ보좌관은 “여당이 되고 보니 피감기관의 인사도 중요하다. 접대 자리 등에서 사적으로 공무원이나 기관장들을 만나본 남자 보좌진들이 확실히 개개인에 대한 정보가 많더라”고 말했다. 대신 ‘접대’를 멀리하는 여자 보좌진들의 강점도 있다. ㅁ보좌관은 “여자 보좌진들은 접대로부터 자유롭기에 더 냉정하게 피감기관을 감시할 수 있다”고 전했다. “남자 보좌진들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자 보좌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김영란법 시행 이전엔) 술자리나 골프 접대를 많이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면 감시가 어려워지지 않겠나.”

“결혼과 출산은 딴 나라 얘기”

의원회관에서 어렵사리 생존하는 동안 많은 여성 보좌진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정책 질의서와 법안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돼버린다. 거의 매달 빠짐없이 열리는 임시국회는 물론이거니와, 국정감사를 포함한 3개월의 정기국회 때 밤샘노동은 일상이다. 별정직 공무원의 불안정한 신분을 고려하면 출산을 위해 휴직을 하기도 쉽지 않은 처지다. ㄹ보좌관은 “의원회관에 배부른(임신한) 여자가 있는지 한번 보시라”며 “민주당 4급 여성 보좌관 17명 중에 결혼한 사람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것”이라고 전했다. 4급 여성 보좌관은 대부분 40대 중반이다.

그나마 드물게 임신과 출산을 마치고 국회로 돌아오는 보좌진들에게도 육아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친정엄마가 없으면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아동학대로 누군가 신고를 하면 나는 장기수일 거다.” ㄹ보좌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2005년 한 여성 보좌진이 나서서 총대를 메고 국회의원 비서관 등 ‘특수경력직 공무원’의 육아휴직, 출산휴가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 제도를 활용할 정도로 ‘간 큰’ 보좌진은 많지 않다. 최전방에서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어가는 보좌진들이 겪는 아이러니다.

직접 입법에 참여하고 정부를 감시하는 보좌진들의 성비가 심각하게 불균형한 상황에선 민의도 왜곡되기 쉽다. 국회 성평등정책연구포럼 등은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 보좌진 할당제 도입, 근속연수 높은 행정비서 승진에 대한 제도적 장치 등을 제시한 바 있다. 남인순 국회 여가위원장도 지난 7월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성평등한 국회만들기 티에프(TF)’ 구성을 제안한 상태다. 남 위원장은 “국회는 국민의 대표인 만큼 상징적인 수준의 노력을 하는 걸 넘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도록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엄지원 김남일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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