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임명장을 받은 다음날인 6월1일 오전 여야 지도부를 만나기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식탁에 자주 오르던 ‘국민반찬’이 사라진 사이, 역설적으로 그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살충제 달걀 사태를 수습하고 관련 부처를 관리·감독하는 컨트롤타워로서 ‘총리’의 권한과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때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책임총리’라는 타이틀은 받았지만, 실제론 ‘책임총리’를 구현하지 못했던 이낙연 총리로선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를 맞은 셈이다. 다음달 7일 취임 100일을 맞는 이 총리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는 과연 ‘책임총리’가 될 수 있을까.
실세 총리는 대통령이 만든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당시 전남도지사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자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 총리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때 대변인을 맡긴 했지만, 당내에선 ‘농도 옅은 손학규계’로 분류됐다. 문 대통령이나 친문재인계 의원들과 특별히 돈독한 관계도 아니었다. 정권교체에 큰 공을 세웠거나 당내 기반이 막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선거 이전부터 이 총리를 눈여겨봤던 문 대통령은 그에게 “일상적 국정은 전부 총리의 책임이라는 각오로 전력을 다해달라”며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지난 5월31일 임명장을 받은 이 총리가 업무에 들어가자 곧 ‘책임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발단은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부산파 친문’으로 꼽히는 배재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임명된 것이었다. 이후 정무(지용호)·민정(이상식)·공보실장(김성재)도 이 총리와 별 인연 없는 이들이 내정되자 ‘외부의 입김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대표적인 실세 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는 자신의 측근을 비서실장(이기우)·정무수석(임재우)·공보수석(이강진) 등에 기용했다. 별정직 비서관 숫자를 3명에서 5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열린우리당 출신 인사들(정윤재·황창화·홍영표 등)을 채용하며 “총리와 진퇴를 함께하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이같은 인사에 대해 당시 “(이 총리가) 자신의 색채를 강화하고 입지구축을 염두에 둔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총리실에 측근을 쓰고, 비서관들이 총리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해 결국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역대 국무총리에 대해 여러 논문을 쓴 한상익 박사(정치학)는 책임총리의 조건 중 하나로 총리비서실을 ‘총리의 사람’으로 꾸리는 ‘친정체제 구축’을 꼽았다. 총리실 안에 우군이 많을수록 총리 어깨에 힘이 실린다는 논리다.
반면 현재 총리실에서 일하는 이낙연 측근은 국회·전남도청 등에서 일한 4~6급 3명 정도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이 총리는 성격상 측근이 전면에 나서서 호가호위하는 것을 싫어한다. 총리 측근이 실장 등 고위직으로 기용되면 그 사람 뒤에 ‘줄’을 서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걸 우려한 탓”이라고 말했다.
이후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이슈인 탈원전 등과 관련한 업무에서 이 총리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했다거나, 인사 문제 등에서 이 총리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선 때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건설 중단을 공약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공사 중단 여부를 국민들의 여론에 따르겠다며 ‘공론화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총리실에 맡겼다. 하지만 공론화위원회는 출범 직후부터 역할과 권한을 놓고 흔들리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총리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과연 이 총리가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하고 있느냐도 논란이 됐다. 총리실 쪽은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인선의 권한과 책임은 오롯이 청와대로 쏠리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사실 대통령제에선 책임총리는 이상에 가깝다. 총리의 힘은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며 “지금처럼 문 대통령이 만기친람하는 경우엔 총리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가 가진 ‘정치적 자산’이 책임총리를 맡기엔 역부족이란 분석도 있다. 이 총리는 ’디제이피(DJP) 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단일화에 합의하고 초대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필 전 총리처럼 정권 창출에 ‘지분’이 있거나, 이해찬 전 총리처럼 탄탄한 정당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선 의원 출신으로 전남도지사까지 지낸 이 총리는 호남 지역 기반은 갖추고 있지만, 여당 내 기반은 약한 편이다. 또 문 대통령이 이미 견고한 당내 지지 세력을 보유하고 있어, 이해찬 전 총리처럼 대통령을 대신해 여당을 다잡고 설득해나갈 필요성이 낮다.
그러나 ‘시스템’을 강조하는 문 대통령의 성향상 이 총리가 힘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한상익 박사는 “문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총리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책임총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비서실장을 맡으며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와 나누는 것의 장점 및 효율성을 봤다”며 “이 총리에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과 이 총리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매주 월요일마다 1시간 이상씩 만나 오찬을 함께 하거나 차를 마시며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6월12일 이후 지금까지 모두 8차례 주례회동을 했다. 최소한 대통령과 총리의 소통 틀은 갖춰진 셈이다.
국정의 컨트롤타워, 개헌의 버팀목 될까?
정치권에선 실세 총리가 되는 두가지 조건으로 대통령의 신뢰와 함께 총리의 ‘능력’을 꼽는다. 최근 이 총리는 각종 현안을 야무지게 진두지휘하고 있다. 지난 17일 현안점검회의에서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살충제 달걀’과 관련한 질문에 우물쭈물하자 이 총리는 “제대로 답변 못 할 거면 기자들에게 브리핑하지 말라”고 질책했고, 21일 국회에선 류 처장의 거취를 검토할 수 있다며 ‘공격적 방어’로 대처했다. 지난 18일엔 지방 재정 분권에 대해 행정안전부 공무원이 보고하자 “만족스럽지 못하다. 담대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총리는 박찬주 대장의 ‘공관병 갑질’ 사건이 벌어지자, 주무부처인 국방부를 뛰어넘어 모든 부처에 이런 갑질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수조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언론인 출신인 이 총리는 <동아일보> 기자 시절 ‘팩트’에 대한 집념과 매서운 일 처리로 후배들을 벌벌 떨게 만들 만큼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총리실의 정영주 의전비서관은 “이 총리는 현안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르다. 현안 보고를 받으면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보고에서 부족한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해 부처 간부들을 지도한다. 대충 하면 박살난다”고 전했다. 이 총리의 한 보좌진도 “답을 못 하면 사자 우리에 들어가 있는 비참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몰아세운다”고 말했다.
까다롭고 깐깐한 스타일이지만 이 총리의 또다른 장점은 언변과 소통 능력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낙연 기자’를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지만 “머리가 곱슬이고 숱이 적다”는 이유로 처음엔 이 총리를 당 대변인에 맡기길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대변인 직을 잘 수행하자 “진작 시킬 걸 그랬다”며 후한 평가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는 지난 6월1일 심상정 당시 정의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막걸리 마셔가며 야당 정치인과 소통하겠다. 역사상 가장 막걸리를 많이 소모하는 총리공관이 될 것이다. 팔도 막걸리는 다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로 그는 정의당·바른정당·청와대 참모 등을 총리실 공관에 초대해 막걸리를 접대했다. ‘팔도 막걸리’ 약속도 잊지 않아 정의당 의원들과의 만찬에선 이정미 대표의 고향인 부산에서 주조한 막걸리를 냈다. 청와대 참모진, 총리실 고위직과의 저녁 자리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나고 자란 전남 장흥에서 만든 막걸리를 접대했다. 한 측근은 “이 총리는 술을 많이 마시는 건 아니지만 술자리에선 계급장 떼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막걸리 소통도 그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 총리가 국정 현안을 총괄하는 전권을 쥐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개헌 논의에서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실세 총리의 기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개헌론자’인 이 총리는 지난 2008년 당시 한나라당 이주영, 자유선진당 이상민 의원과 함께 국회 미래한국헌법연구회를 만들어 2012년까지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당을 초월한 인맥 형성을 통해 개헌 논의에 앞장섰던 경험은 이 총리가 앞으로 개헌 논의 과정에서 야당과 청와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 총리는 개헌에 적극적이고 학습이 돼 있는 사람”이라며 “문재인 정부에서 이 총리에게 개헌에 대한 일정 권한을 부여하면 정치권과 타협하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는 도지사 시절에도 개헌 논의에 앞장섰다. 올 1월 전남도지사 신분으로 광주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린 ‘지방분권형 헌법개정 광주·전남 국민주권회의’ 출범식에 참석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대통령 권력 집중의 폐해를 지적하며 “개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개헌 없이는 시작도 될 수 없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중앙정부에 예속된 껍데기다. 지방분권이 지역 균형발전과 같이 가는 것은 아니므로, 균형발전을 위한 중앙정부의 조정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의 지방분권형 개헌 공약을 실현하려면 지방자치단체장들과의 소통이 중요한데, 3년여 도지사 경력이 지자체장과의 협의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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