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생명력으로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은 이인제 전 의원. 그래픽 김지야
불사조 이인제(일명 피닉제) 전 새누리당 의원이 4번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 전 의원은 15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대선 출마 회견을 열어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 일자리 확충 등을 약속했다. “적폐를 대담하게 청산하겠다”며 재벌개혁도 얘기했다. “무분별한 세습경영은 재벌기업을 망가뜨리고 결국 재벌가문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통일은 경제”라는 슬로건은 출마선언문의 제목으로 달 정도로 무게를 두는 내용이었다. 이 전 의원은 “북한체제는 더 이상 본질적 변화를 피할 수 없다. 통일의 여건은 성숙되었고 그 결정적 기회가 아주 가까이 오고 있다”며 “통일은 경제 그 자체다. 실업이나 불경기도 통일이 몰고올 대성장의 폭풍 속에서 해결되고, 지금 절망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극한 대치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나빠지는데 “통일은 대박”이라고 목소리 높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15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는 이인제 전 의원. 페이스북라이브 캡처.
이 전 의원은 새누리당에서 19대 대선 도전을 선언한 첫번째 정치인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대선 준비를 할 수 없는 정당”(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이라는 새누리당의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한 셈이다. 이 전 의원은 “탄핵정국이 아니고 12월 대선이라고 해도 좀 늦은 편이다. 원래는 지난말부터 대선 레이스가 시작돼야 해서 제 대선 출마는 늦은 편”이라며 “지난 20년간 시련과 역경을 견디며 많은 경험을 축적하면서 이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경제·안보 위기를 타개하는 데 제가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국민들께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1948년생으로 올해 69살인 이 전 의원의 첫번째 대선 도전은 20년 전이었다. 1993년 김영삼 정권 시절 최연소 장관으로 기용된 그는 경기지사를 거쳐 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고 1차 투표에서, 강력한 대세를 형성했던 이회창 후보(41.1%)에 이어 2위(14.72%)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 전 의원은 그러나 신한국당을 탈당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이는 명백한 경선 불복으로, 그뒤 정당 내부 경선에 참여해 패배하면 출마를 할 수 없게 하는 ‘이인제 방지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해 대선에서 이 전 의원의 성적표는 이회창 후보에 이은 3위(득표율 19.2%)였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뒤 이 전 의원은 새천년민주당과 국민신당의 합당 형태로 다시 여당 정치인이 된다. 2002년 대선에서는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대세론을 형성했으나 민주당의 전국 순회 국민경선제에서 급부상한 노무현 후보에게 압도당했다. 이 전 의원은 그해 12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이인제 방지법’에 따라 대선에 나서지는 못했다.
2002년 3월, 민주당 광주 경선에 참여한 대선 예비후보들. 왼쪽부터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이인제, 한화갑 후보. 한겨레 자료사진
이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빠져나가 소수당으로 쪼그라든 민주당에 2007년 입당해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다. 김민석·신국환·장상·조순형 후보와의 경선에서 조직투표 논란 속에서 대승을 거둬 17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게 됐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16만표(0.68%)를 얻었다. 이명박-정동영-이회창-문국현-권영길에 이은 6위였다. 10년 전 대선에서 얻었던 492만표의 3% 수준으로 확 쪼그라든 처절한 패배였다.
2012년 총선에서 그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6선에 성공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피닉제(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와 이인제의 합성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해 10월엔 자유선진당이 이름을 바꾼 선진통일당과 새누리당이 합당하는 방식으로 다시 여당 입성에 성공한다. 그 뒤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일조하고, 2014년 7월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며 지도부에 진출해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총선에서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패해 7선 고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네번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번이 그의 마지막 대선 도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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