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머슴이 되고픈 의원의 손과 발과 머리가 되는 사람들이 보좌관입니다. 정치부터 정책까지 의원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현장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익명의 여러 보좌관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정치의 속살’을 전합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전 국회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의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질의를 듣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아, 올 것이 왔다. 원내대표실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전, 반대입니다.”
검찰과 경쟁하는 청문회 성과낼 수 있을까…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영감(보좌하는 국회의원)이 “그럼 하지 맙시다”라고 흔쾌하게 답했다. 솔직히 안 내켰다. 국정조사는 본래 한계가 많은 제도다. 증인을 강제로 소환할 수도 없고 민간 자료를 쉽게 받아보기도 힘들고 국조 과정에서 혐의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기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정감사와 검찰 수사에서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서라면 나올 건 이미 다 나온 것 같은데 국조에서 뭘 더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게다가 특별검사의 수사가 곧 시작될 터인데 특검과 경쟁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 않나. 특검 수사팀은 105명이나 되는데 국회 국조특위 위원은 18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국정조사에 차출되면 주말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렇다는 구질구질한 인상을 주긴 싫었다. 그래서 그냥 “반대”라고만 간단하게 말했다.
그런데 3시간 뒤 영감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런 초유의 사태를 못본 척 그냥 넘기긴 싫다는 뜻이었다. ‘그래,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 다음은 특검이 알아서 수사하면 되지 뭐’ 하며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누리꾼 자료와 SNS로 ‘득템’
“저희가 안 들어갈 이유가 없죠.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큰 사건들은 이미 다 드러난 터. 청문회장에서 밝힐 새로운 내용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번 청문회는 9개 그룹 총수들을 비롯해 화제의 인물들이 출석할 태세였고 혹자는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 비교하기도 했다. 웬만큼 해도 20대 국회엔 ‘왜 노무현 같은 청문회 스타가 없냐’는 지청구가 쏟아질 게 뻔했다.
이미 국감, 검찰수사에서 행정부 자료는 거의 다 나왔을 테니, 이제는 ‘시민의 제보’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감은 자신이 가진 인맥을 총동원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알았을까 싶은 사람들까지 다 등장했다. 병원 원장, 고급 의류점 사장, 기업 임원 등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취재가 시작됐다. 직접 최순실을 아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최순실 건물에 세들었던 사람, 최순실을 통해 특혜를 받은 기업의 경쟁사 등을 인터뷰했다. 조금씩 자료가 쌓여갔다. 88년 청문회 때와 비교한다면, 이번 사건은 온라인이 중요한 수단이 됐다. 스마트폰으로 분야별 대화방이 12개 개설됐다. 전문가들의 조언이나 시민들의 제보가 있으면 주제별로 담당을 맡은 보좌진에게 전달했다. 사건의 성격상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단일 창구가 되어 담당자에게 전해줘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누리꾼 중엔 ‘최순실 전문가’가 의외로 많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해당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글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이들이 청문위원이었더라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 같은 ‘모르쇠’ 증인들도 박살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보좌진들끼리 회의를 하다가 아예 이 사람들에게 제보를 받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마 추적이나 압수수색이 어려운 외국에 서버를 둔 이메일과 에스엔에스(SNS) 계정을 통해 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탄핵 표결일이 다가올 수록 제보의 질도 높아졌다. 전직 청와대 행정관, 전직 군인, 기업 임원 등 아주 내밀한 자리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제보도 이어졌다. 조각조각을 모으다 보니 조금씩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탄핵안 통과 뒤에도 제보 메신저는 ‘띠링 띠링’
그러나 검증이 필요했다. 아무리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자료나 애꿎은 사람을 지목해 문제가 된다면 그 자체로 우리에겐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아까워도 검증이 안되는 자료는 과감히 폐기했다.
보좌진들은 아침 드라마의 방송 대본을 쓰는 작가의 심정으로 가장 쉬운 말과 명쾌한 단어를 골라 질의서를 쓰려고 했다. 최순실 사건이 ‘막장 아침 드라마’ 였으니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의원은 우리가 쓴 질의서를 ‘빨간펜’으로 토씨까지 고쳤다. 질의 내용이 의원의 입에 착착 붙지 않으면 말이 어눌하게 나올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1~2차 청문회가 끝나고 234명의 찬성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탄핵 뉴스가 흘러들어오는데 우리가 개설한 ‘제보 대화방’에 메시지가 떴다. “이거 공개되면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요. 보호해주실 수 있나요?” 대통령 탄핵안은 국회 손을 떠났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는 이 제보를 추적 중이다. 다음 청문회를 기대하시라.
시민들의 ‘최순실 제보’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한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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