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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로 깎아낸 ‘최순실 예산’

등록 2016-11-29 17:36수정 2016-11-29 17:50

정치BAR_보좌관Z의 여의도 일기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머슴이 되고픈 의원의 손과 발과 머리가 되는 사람들이 보좌관입니다. 정치부터 정책까지 의원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현장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익명의 여러 보좌관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정치의 속살’을 전합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유성엽 위원장(뒷모습)이 지난 25일 전체회의를 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유성엽 위원장(뒷모습)이 지난 25일 전체회의를 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지난 가을 국정감사 때 ‘최순실·차은택 국정농단’의 주요 무대였던 문화체육관광부의 행태를 보면서, 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공무원”이라지만 반복되는 위증,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하급 직원에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부당한 지시에 대한 회의 없이 모두 ‘예스맨’이 돼버린 문체부 공무원들을 지켜보자니,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마저 떠올랐다.

뻔뻔한 문체부에 분노하다

나는 문체부 공무원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방법은 단 하나, 예산을 옥죄는 것이었다. 마침, 우리 의원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예산소위 소속이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의원에게 “최순실·차은택 관련 예산은 과감하게 감액이나 삭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원은 “징벌적 삭감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냈지만, 나는 “비뚤어진 예산을 정상적 궤도로 재진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문화예산의 정상화로 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의원의 허락을 얻자마자 나는 예산소위 소속 야당 보좌관 4명과 티에프를 꾸렸다. 예산안 심사는 워낙 시간이 촉박하고 내용이 방대해 협업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우리는 첫 회의에서 ‘최순실·차은택 예산’ 삭감을 위한 ‘작전명’을 최·차 두 사람의 이니셜을 따 ‘시-머니 헌팅’(C-MONEY HUNTING)이라 붙였다. 보좌관들은 문화콘텐츠산업 예산, 문화창조융합 관련 예산, 신규·순증 예산, 2014년 이후 급증한 예산 등으로 갈래를 나눈 뒤 각 의원실에서 분담해 ‘문제있는 시-머니 목록’을 작성하기로 했다.

C-MONEY HUNTING…‘최순실 예산’ 삭감에 야당 보좌진 의기투합

워낙 최순실·차은택 사건이 초대형 이슈였기 때문에 이들 관련 예산도 쉽게 깎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법하지만, 실제로 이미 진행중인 사업에 차질을 빚지 않으면서도 문제되는 ‘시-머니’를 골라내는 건 레이저를 이용한 정교한 외과수술과도 같은 작업이었다. 보좌진 모두 귀가를 포기하고 사무실 한켠에서 쪽잠을 잤다. 나는 책상 앞에 “찾아야 한다”라는 문구도 출력해 붙여놓고 의지를 다졌다. 결국 우리는 이틀을 꼬박 샌 끝에 문체부 예산 중 3000여억원에 이르는 ‘시-머니’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우리는 일단 문체부가 자체적으로 ‘시-머니’ 상세 내역과 자체적인 감액안을 제출하도록 한 뒤 심사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문제 예산은 전액 삭감하되, 이미 집행된 예산 중 민간 예산은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며, 문체부 감액이 50% 이하이면 70%까지 감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체부가 가져온 자체 예산 감액안을 보니, 전체 ‘시-머니’ 중 26%만 감액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야당은 68%까지 더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 여당 의원은 정부 예산안을 방어하는 데 주력하는 게 일반적인데 ‘시-머니’ 삭감에 대해서만은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최순실-차은택 사건과 관련해선 입씨름 벌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3천억 중 70% 목표…55% 삭감 성공

문체부 공무원들만 ‘수용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고, 야당 의원들과 문체부는 밤새 줄다리기를 벌이다 겨우 ‘55% 감액’으로 협상이 마무리됐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회의에 매달리느라 겹겹이 쌓인 피로감, 그 와중에도 70% 감액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대정부 질문과 국정감사, 그리고 예산심사가 휘몰아친 자리, 보좌진들에겐 ‘상처뿐인 영광’뿐인 듯했다. 서로 고생했노라고 인사를 건네며 국회 본관을 나왔을 때 시계는 새벽 5시32분을 가리켰다. 불그스레 동쪽 하늘을 물들이며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의원회관으로 옮기며 자면서 걷는 것인지, 걸으면서 자는 것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는데 뒤편에서 다른 보좌관이 소리쳤다. “○○○ 보좌관님, 이제 ‘국정교과서’ 하셔야죠!”

예산안 심사 내내 호흡을 맞춰온 그 보좌관이 그처럼 얄미웠던 적이 없었다.

예산심사 끝나자마자 ‘국정교과서’로 밤새는 한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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