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 파문 관련 대국민 담화를 마친 뒤 취재진 앞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4일 대국민 담화를 했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두번째 사과였습니다. 담화의 내용에서 눈에 띄는 몇 대목이 있습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 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 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만큼은 꺼뜨리지 말아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최순실 의혹의 핵심인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을 ‘재단 설립 과정에서 최순실씨가 이권을 챙기고 위법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구상했을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이라는 재단 설립의 ‘목적’은 정당했다는 주장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단 설립 경위에 대해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공정한 수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10월20일 국무회의에서 두 재단의 설립 및 모금 경위를 이미 자세히 밝힌 적이 있습니다. (▶10월20일 국무회의 발언 전문)
당시 발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이에 문화체육 분야를 집중 지원하고 우리 문화를 알리며 어려운 체육 인재들을 키움으로써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수익 창출을 확대하고자 기업들이 뜻을 모아 만들게 된 것이 두 재단의 성격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많은 재단들이 기업의 후원으로 이런 사회적 역할을 해 왔는데 전경련이 나서고 기업들이 이에 동의해 준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재단 설립의 경과입니다.”
결국 11월4일 대국민 담화의 바탕을 이루는 박근혜 대통령의 기본 인식은 10월20일 국무회의 발언 당시의 인식에서 달라지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의 목적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미래 성장 동력 만들기’라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굳은 신념이라는 얘깁니다. 따라서 앞으로 검찰과 특검의 수사가 이뤄져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을 바꿀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건의 윤곽만 살펴봐도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 비리의 본질은 개인 박근혜·최순실·차은택 등이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 재벌들에게 돈을 뜯어내 사적 이익을 챙긴 사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의 인사·예산·운용을 이들이 좌지우지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의 불법과 비리에 대한 법률적 규정은 앞으로 검찰이나 특검의 수사로 더 철저히 밝혀낼 일입니다.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의 사고방식과 논리구조는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을 ‘죄의식 없는 확신범’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맞는 분석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하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책임총리나 거국내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국민들의 다수는 하야나 탄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은 대통령 권력을 넘기고 ‘2선’으로 물러나라는 의견이 많은 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처럼 잘못된 인식과 태도를 유지한 채 버티면 어떻게 될까요? 대통령을 강제로 끌어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으로 쫓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국회의 탄핵소추에는 재적의원 3분의 2(20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정치지형상 쉽지 않습니다. 소추가 되면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대통령 권한 행사는 정지됩니다. 나라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큰 혼란이 불가피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이승만 대통령 하야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물론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경찰이 총으로 쏘아서 죽이도록 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 하야 요구를 받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혁명 8일째인 4월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지만 계엄군은 시민편이었습니다. 하야 성명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는 왜 들어갔을까요? 끝까지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마음일 것입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라는 표현도 재미있습니다.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신은 몰랐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유체이탈 화법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에서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몰랐다는 얘깁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오자 이날 오후 국회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에서 제시한 “①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한다 ② 3·15 정부통령 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내각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미련을 보였습니다. 4월27일 비서들이 국회에 제출할 사임서 초안을 내밀자 이승만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사임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허정 외무부 장관과 김정열 국방부 장관이 질서유지를 장담하자 마지 못해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5월29일 김포공항에서 하와이로 출국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90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치유했습니다. 그 자랑스런 4·19를 ‘박정희 소장’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짓밟았습니다. 쿠데타 당시 9세였던 ‘박정희 소장’의 딸이 52년 만인 2013년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처럼 국민들의 하야 압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요, 전진하는 것일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