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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에서 배워라, 민원을 사랑하라

등록 2016-08-16 16:50수정 2016-08-16 18:45

정치BAR_보좌관 Z의 여의도 일기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머슴이 되고픈 의원의 손과 발과 머리가 되는 사람들이 보좌관입니다. 정치부터 정책까지 의원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현장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익명의 여러 보좌관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정치의 속살’을 전합니다.

이정현 의원 사무실에 선거구 지도에 붙어 있는 각종 지역민원 사항.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이정현 의원 사무실에 선거구 지도에 붙어 있는 각종 지역민원 사항.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보좌관은 민원을 통해 배운다. 그러니 보좌관은 민원을 사랑해야 한다. 이 생각을 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만약 10년 전 그때 그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나는 민원을 하찮고, 귀찮게만 생각했을 것이다.

국회 보좌진이라면 모두 소위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일)에 시달린다. 온갖 민원이 대표적 ‘듣보잡’이다. 귀찮기 짝이 없다. 국회에 오는 민원은 민원의 종착점인 경우가 많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다 안될 때,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국회이기 때문이다. 해결이 안 될 게 뻔한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 성가시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지역구민이 전해오는 온갖 잡다한 개인적인 민원은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갑갑해질 때가 허다하다. 민원 접수부터 손사래를 치고 싶을 만큼 개인 이익을 위한 민원도 있다. 이렇게 민원이면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내가 민원을 대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태도부터 바뀌게 된 데는 부끄러운 사연이 있다.


도박에 빠진 아들 구해달라는
지역구민 전화 한통에서
‘바다이야기’ 심각성 절감
대출 도와달라는 민원 통해
은행 대출의 문제점 밝혀
귀찮기만 했던 민원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


2006년이었다. 영감 지역구 사무실 건물 1층에 환전소라고 푯말이 적힌 조그만 사무실이 새로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회 사무실에 전화 한통이 왔다. 연로하신 분이었다. 대뜸 “우리 아들 좀 정신차리게 해주쇼. 도박하다 3천만원이나 까먹었어”라고 하셨다. 맘속에서는 국회가 흥신소도 아닌데, 귀찮기만 한 이런 전화를 어떻게 하면 빨리 끊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네, 네, 어르신, 저희들이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 분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바다 이야기’ 하다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먹었어. 근데 어떻게 국회의원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바다이야기 도박장이 생겨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 피 빨아먹고 있는데, 국회의원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냐”며 울분을 토하셨다. 지역구 사무실이 있던 건물 1층에 환전소가 어느 날 생겼던 것도 지하에 ‘바다 이야기’ 도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당시는 ‘바다 이야기’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황이었는데, 바로 코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감의 다음 선거 당선만을 위해 일하는 내가 정말 미웠다. 이 일을 보고 받은 영감도 부끄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소 잃고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심정으로 경찰서로 전화해 그 도박장을 폐쇄시켰다.

이 일을 겪고 난 뒤부터 민원인이 찾아오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최소한 그 절박한 마음에 공감이라도 해드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민원에서 ‘진주’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국회사무실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현장의 부조리, 그 단서가 민원 내용에서 발견되었다. 법과 제도는 완벽한데 실제는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가령 중소기업을 하는 지역구민한테서 대출에 문제가 생겼으니 좀 알아봐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예전 같았으면 국회가 대출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만 하고, ‘방법이 없다’며 건성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활성화한다면서 실제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출 문턱을 높게 하고 있는 생생한 사례였다. 그리고 그 민원을 의정활동으로 연결시켰더니 이른바 ‘대박’이 터졌다.

또 하나의 변화는 민원이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민원 내용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다. 10년 전에는 취직시켜 달라는 민원이 대부분이었다면, 몇년 전부터는 인턴 자리라도 알아봐달라는 것으로 변하더니 최근엔 돈은 필요 없으니 회사 경험, 즉 스펙이라도 쌓을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얘기해 달라는 게 다반사다. 어떻게 하면 군대에 빨리 갈 수 있는지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민원도 있다. 결국 국회의원을 뽑아주는 것도 국민이고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는 것도 국민이었던 것이다.

민원이 고마운 한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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