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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대통령이면 충분하다

등록 2016-08-03 09:42수정 2016-08-03 09:59

정치BAR_김도훈의 낯선 정치_‘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위한 변명
박대통려이 21일 오후 성남시 판교 벤처벨리를 방문해 창업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2016.07.21.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박대통려이 21일 오후 성남시 판교 벤처벨리를 방문해 창업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2016.07.21.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힐러리가 유리 천장을 깼다. 그녀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가 된 여성은 아니다. 1872년부터 대선에 도전한 여성은 2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주요 정당 대선후보가 되어 백악관에 들어설 가능성을 5 : 5까지 만들어낸 여성은 없었다. 역사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역사적이라고 말할 때 묘한 역풍의 댓글들이 분다.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가 된 것에 대해 굳이 ‘여성’이라는 걸 강조하는 게 올바르냐는 지적들이다. 지적을 하는 대부분은 샌더스 지지자들이다. 좌절감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니 이해하고 넘어갈 법도 하다. 다만, 한국에는 또 하나의 역풍이 있다. ‘여성 대통령, 우리가 먼저 겪어봤는데 그거 중요하지 않다’는 논지의 댓글들이다(실제 댓글들은 이보다 더 포악해서 차마 여기에 곧이곧대로 옮길 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자, 나는 지금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변호할 생각이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이 글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제일 아래의 댓글난으로 달려가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법정에 선 모든 피고인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그게 민주주의이자 법치주의 아니겠는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이 여성을 위해서 한 일이 모래 서너 알 정도라는 사실은 팩트다. 그녀가 여성 정치인이 되고 싶은 소녀들의 좋은 롤모델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녀는 힐러리가 아니다. 하지만 좋은 대통령이 아니라고 공격하기 위해 그녀의 여성성을 소환할 필요 또한 모래 서너 알만큼도 없다.

그녀만큼 별명이 많은 대통령은 없다. 가장 유명한 건 ‘수첩공주'다. 그녀가 항상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메모를 한다는 것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녀만 수첩을 갖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정현도 수첩을 갖고 다닌다. 조해진도 수첩을 갖고 다닌다. 많은 기자 출신 정치인들이 수첩을 갖고 다닌다. 수첩은 좋다. 그것으로 꼼꼼하게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박근혜만이 수첩공주로 불린다. 공주라는 단어는 그녀의 아버지가 독재자였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쓰이는 동시에,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적 존재로 내려앉히기 위해 쓰인다.

‘얼음공주’라는 별명도 그렇다. 그녀는 차갑다. 미소를 잘 짓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힐러리에게도 매번 제기되는 지적이다. 웃어라, 왜 그렇게 딱딱하냐, 미소를 더 지어라 이런 지적은 불공평하다. 누구도 버니 샌더스에게 좀 더 웃으라거나 왜 그렇게 인상이 딱딱하냐고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김무성에게 좀 더 부드럽게 웃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문재인의 표정이 지나치게 경상도 아재적으로 딱딱하다고 지적하지도 않는다. 닭통령은 어떤가. 2016년의 우리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거의 초월적으로 여성혐오적인 속담을 굳이 소환해서 이런 별명을 지어야 할 만큼 마음이 가난한가? 댓통년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는 순간 내 입술이 바이러스에 침투당해 썩어버리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한동안 즐겁게 쓰였던 ‘말이 안통하네트’가 있다. 그런데 이 별명으로부터 박 대통령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변호해야 한다. 그녀가 저지른 짓들이 남편인 루이 16세보다 더 큰가? 그럴 리가. 그럼에도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민중의 공적으로 더욱 격렬하게 공격해왔다. 특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은 ‘정치도 세상도 이해 못하는 머리 텅 빈 여자들’이라는 고정관념을 대변하는 거의 역사적인 문장으로 남았다.

사실 이건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나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프런트 페이지에 사용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남자도 여자도 모두 웃었다. 합당한 풍자였는가? 아니. 돌이켜보건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말이 잘 안 통하는 대통령이다. 그러나 지금은 2016년이고, 여성 대통령을 풍자하기 위해 공주와 닭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어코 소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젠더를 공격하고 싶은 약간의 심술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 조언은 이거다. 일단 멈추라. 자리에 앉으라. 그리고 케이크를 먹으라. 단 걸 한 조각 먹고 나면 그 욕망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건 매우 과학적인 조언이다.

김도훈은 온라인 미디어 허프포스트의 한국판 편집장이다. 그는 하드뉴스는 소프트뉴스를 더 존경해야하고, 소프트뉴스는 하드뉴스를 더 경의해야한다고 믿는다. 종종 이 칼럼은 고양이가 대신 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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