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BAR

더민주 86그룹, 새로운 ‘운동’을 마주하다

등록 2016-05-18 22:25수정 2016-05-20 10:17

정치BAR_다시 시험대 선 86그룹

“위하여! 위하여!”

술잔 부딪는 소리에도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담소를 나누는 목소리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 20대 총선 한 달여가 지난 16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모임을 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동우회원들은 쏟아지는 관심을 의식한 듯 사뭇 신중한 태도였다. 전대협 1기 부의장 출신인 우상호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직을 맡은 뒤, 전대협을 비롯한 ‘86그룹’(1960년대 출생, 1980년대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정치인)의 움직임에 세간의 눈길이 쏠린 까닭이다.

이날 만찬은 전대협 동우회가 4·13 총선 출마자 중 낙선한 이들을 위로하고 당선자들에겐 축하패를 전달하기 위해 준비했다. 하지만 정작 위로와 축하를 받을 이들이 자리에 나서질 않았다. 동우회 모임이 외부에 알려지자 우 원내대표 등이 불필요한 오해를 우려해 발길을 돌려서다. 30여명이 참석하기로 했던 만찬은 10명 남짓한 이들만 모인 조촐한 자리로 쪼그라들었다. 전대협 출신 당선자 10명 가운데선 성균관대 부총학생회장 출신인 박완주 원내수석부대표 등 3명만 모임을 찾았다.

“‘86운동권’이라고 하지 말고 ‘86그룹’으로 불러 달라.” 이날 박 수석부대표가 기자들을 만나 당부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2000년 전후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정치권에 영입된 뒤, 더민주의 86그룹들은 숱한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리더 격인 우 의원이 원내대표로 나서면서 다시 한번 전면에 서게 된 지금, 이들의 ‘긴장감’은 남다르다.

기대보다 실망감이 컸다
2000년 전후 ‘젊은 피’로 수혈
17대 총선땐 12명 입성했지만
당 대표·유력 대선주자 밑에서
주요당직 도맡으며 보호막 노릇
“특권 해체·약자 대변 실패” 자성


떠들썩한 등장

‘세대론’은 범박하다. 삶의 배경과 경험의 구체성이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거친 평가 방법이다. 하지만 격변의 시기를 지난 어떤 세대에선 공유된 경험의 강도와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1980년 광주 민주항쟁부터 1991년 ‘분신정국’에 이르기까지 함께 반정부투쟁에 집중했던 86세대는 날카로운 정치의식과 강력한 연대감을 공유하는 세대다. 하지만 정치권에 처음 발 디딘 뒤 이 “뜻있고 젊은 일꾼들”(김대중 전 대통령)은 줄곧 ‘기대 이하’라는 평을 받아왔던 게 사실이다.

86그룹이 국회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다. 우상호·이인영·정청래·최재성 의원 등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은 12명이 대거 당선됐다. “길 가다 지갑을 주웠다”(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이들 스스로는 “전대협의 힘이 과시됐다”고 자신했다. 국회 개원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이 마련한 청와대 만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것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자만과 독선’. 이후 86그룹에 따라붙은 꼬리표다. 더민주의 한 당직자는 “별 어려움 없이 금배지를 달았던 때여서 소년급제의 부작용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돌이켰다.

386에서 486, 586으로 연륜은 쌓였지만 86그룹의 행보는 기대보다 ‘실망감’을 더했다. 그들 자신의 정치를 보여주길 바랐던 시대적 요구와 달리 여러 당대표나 유력 대권주자들 밑에서 주요 당직을 도맡아, 당내에선 ‘하청정치’, ‘숙주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86그룹의 ‘후배’ 격인 한 더민주 의원은 “86세대가 야권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면 재야운동·학생운동에서 익힌 강점을 드러냈을 텐데 여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집권세력의 보호막 구실을 하느라 독자적 정체성을 드러내긴 어려웠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하청정치 종식’과 ‘386 독자정치화’를 내걸고 이인영·백원우·최재성 후보 등이 뛰어들었던 2010년 당 전당대회에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기성 정치인들과 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2015년 전당대회에서도 당대표 후보로 나선 이인영 의원은 문재인-박지원 양자 구도를 전혀 허물지 못했다.


영광보다 상처

그들만의 ‘동지애’는 때로 ‘패거리’ 문화로 비치기도 했다. 2014년 7월 보궐선거 공천을 앞두고 정동영·천정배 등 당 중진들의 출마설이 나돌자, 이를 견제하려 ‘중진 험지 출마’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리거나, 학생운동 ‘동지’인 허동준 서울 동작을 지역위원장을 집단적으로 지지해 공천을 압박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런 행태는 후배 세대로부터도 비판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보궐선거 전패 뒤 꾸려진 당 혁신위원회 소속 이동학 혁신위원은 86그룹을 향해 공개편지를 썼다. 30대 정치인인 이 혁신위원이 볼 때 86그룹은 “후배 세대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86그룹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영춘 전 의원(20대 총선 당선자)은 2013년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386 책임론’을 참회하는 반성문을 띄웠다. “민주당 386 정치인들은 정치적 견해에 따른 정파활동보다는 줄서기, 줄잡기에 급급한 행태를 보였다. 불공정한 특권구조의 해체와 사회경제적 약자의 대변이라는 소명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그는 적었다. 그에 앞서 3월엔 당내 86그룹 모임 ‘진보행동’이 해체를 선언했다. 운영위원을 맡고 있던 우상호 의원은 당시 진보행동의 마지막 토론회에서 “우리는 기존의 정치문법을 배웠고, 기존의 관행을 혁파하는 데 주저했다”고 자성했다.

하지만 그 뒤 잇따른 탈당·분당 사태에서도 86그룹은 ‘진지한 성찰 없이 뒤로 숨어버렸다’는 게 당 안팎의 평가다. 우 원내대표 정도가 탈당파와 ‘주류’ 가운데서 중재에 나섰던 이로 꼽힌다.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6 정치인들이 가치를 위해 단결해왔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받겠지만 그들은 여태껏 주류와 함께 일을 도모하며 기술자 구실만을 해왔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야권이 분열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치열함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픈 시간을 거친 만큼 더는 옛 연줄로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86그룹
더불어민주당 86그룹


‘현장형 86’의 합류

‘86그룹 퇴조’, ‘힘 빠진 86그룹’, ‘흔들리는 친노·운동권’…. 4·13 총선을 앞두고 언론이 내놨던 전망이다. 김종인 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운동권 정치 청산’에 방점을 찍은데다 강기정·오영식·정청래 의원 등 86그룹의 대표선수들이 여럿 낙천하면서 “86의 시대가 갔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 총선에서 역설적으로 86그룹은 더 ‘강하게’ 살아 돌아왔다. 26명의 전대협 간부 출신 본선 출마자 가운데 10명이 당선됐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내 전대협 간부 출신 당선자가 12명인 것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다. 초선 당선자 57명 가운데 학생운동의 기억을 가진 86세대는 기동민 원내대변인을 비롯해 10명이 넘는다. 하지만 20대 국회에서 30명쯤 되는 더민주의 86그룹들이 기존에 비판받아온 ‘강성 운동권’ 이미지와 패거리 문화를 고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삶의 궤적이 천차만별이어서다.

16~17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단 86그룹 정치인 중엔 학생운동·재야운동의 경험만을 가진 ‘총학생회장’ 출신이 많았다. 이들 중 20대 총선 당선자는 송영길·우상호·이인영·김영춘 정도다. 이에 견줘 이번 초선 당선자 중엔 학생운동 뒤 전문직이나 생활밀착형 정치를 경험한 86세대가 많다. 20여년간 농민운동을 해온 김현권, 25살 때부터 김대중 총재의 비서를 해온 김한정, 치과의사인 신동근, 검사 생활을 하다 검찰을 비판하고 나온 백혜련 당선자 등이다.

모두 ‘86그룹’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이들에게 가치의 동질성을 요구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우 원내대표는 “정치권에 ‘질서있게’ 들어온 것(영입)은 나를 비롯해 이인영, 오영식, 임종석 등으로 대표되는 전대협 의장 그룹뿐이어서 그밖의 인물들은 안면은 있어도 ‘정치적 결사’로 보긴 어렵다”고 설명한다.

상처 많은 ‘선발대’와 생활 현장의 경험을 가진 ‘후발대’의 만남이 20대 국회에서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까. 한때 86그룹 내 자기비판에 앞장섰던 김영춘 당선자는 “86그룹이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쳐 업그레이드됐다”고 평가했다. 김 당선자는 “한때 86 정치인들은 과잉 책임감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를 시도하고, ‘시장’에 경도돼 보수화한 모습을 보였다”며 “최근의 모습을 보면 노동자·농민·서민 등 우리가 대변해야 할 이들에게 천착하는 집중력이 강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제주도의회에서 10년간 일해온 위성곤 당선자도 “이번에 국회에 들어온 이들은 현장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온 이들”이라며 “기존 86그룹의 중앙정치 경험과 우리의 생활정치 경험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보다 민생, 성공할까
“운동권” 공세에도 30명 가까이 당선
면면도 학생회장 ‘명망가’ 넘어
전문직·생활밀착형 등 다양해져
민생TF 등 현장강조 ‘변화 조짐’
우상호 중심 새정치 해낼지 관심


또다른 도전

아직 미미하지만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 13일 처음 열린 더민주 당선자 워크숍에서 우상호 원내대표 등이 주도해 분야별 민생 태스크포스(TF)를 꾸리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민주는 △청년 일자리 △서민주거 △가계부채 △사교육비 등 4개 분야 티에프를 두고 앞으로 6개월간 현장 방문을 통해 시급한 정책 과제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정치’보다 ‘민생’에 무게를 둔 것이다. 2004년 17대 국회가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안, 과거사기본법제정안, 언론관계법안)으로 진통을 앓았던 것과 대비된다.

86그룹의 ‘막내’ 격인 박홍근 의원은 “86그룹의 가치지향성이 현실정치를 움직이는 실력과 같이 가야 한다는 데 다들 공감하고 있다”며 “사회경제적인 의제들에서 합리적 진보 노선을 강화하되, 외교·안보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자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패거리’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우상호 지도부의 노력도 시작되고 있다. 원내부대표단에 속한 한 초선 당선자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부대표들이 담당하고 있는 의원들 한명 한명의 의견을 묻고 있다”며 “다들 반가워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86그룹의 대리인으로 호명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우상호 체제의 성패가 86그룹의 정치적 미래에 연동돼 있다는 데 당내 의견이 모인다. 그가 호평을 받으면 다가올 전당대회에서 86그룹이 당대표를 배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선주자도 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교수는 “86세대 정치인들은 집단적인 기억 말곤 ‘가치’에 의거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한 적도 없고, 그 세대를 대변하는 뚜렷한 의제를 제공한 적도 없다”며 “지나온 날 무엇을 했는가보단,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정치BAR 페이스북 바로가기
◎ 정치BAR 텔레그램 바로가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1.

‘부정선거 전도사’ 황교안, 윤 대리인으로 헌재서 또 ‘형상기억종이’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2.

선관위 “선거망 처음부터 외부와 분리” 국정원 전 차장 주장 반박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3.

오세훈, ‘명태균 특검법’ 수사대상 거론되자 ‘검찰 수사’ 재촉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4.

이재명 “국힘, 어떻게 하면 야당 헐뜯을까 생각밖에 없어”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5.

이재명, 내일 김경수 만난다…김부겸·임종석도 곧 만날 듯

탄핵 전후 한결같은 ‘윤석열 머리’…“스타일리스트가 했다” 6.

탄핵 전후 한결같은 ‘윤석열 머리’…“스타일리스트가 했다”

[영상] 김민석 “국힘, 100일 안에 윤석열 부정하고 간판 바꿔 달 것” 7.

[영상] 김민석 “국힘, 100일 안에 윤석열 부정하고 간판 바꿔 달 것”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