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태 의원은 야권에서 가장 ‘특이한’ 정치인이다. 야권에선 3선도 드문데 심지어 부산이 지역구다. 현재 야권의 부산지역 의석은 조 의원과 문재인 대표뿐이다. 영남으로 확대해도 민홍철 의원(경남 김해 갑)까지 셋이 전부다. 게다가 젊다. 겨우 마흔여덟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스펙’을 지녔는데 더불어민주당에서 그는 ‘골칫덩이’였다. 1월19일 그가 탈당한다고 하니 더민주 지지자들은 환호하고 있다. 앓던 이가 스스로 빠진 격이다.
1. “부산 3선 의원이 있었어?”…오로지 지역구
부산 틈새 조경태 (부산 사하을)후보가 열린우리당 후보로서는 유일하게 부산지역에서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과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3년 5월 당 지도부 경선에 출마한 조 의원은 2위로 최고위원에 뽑혔다. 현장에선 진작부터 그의 ‘돌풍’이 감지됐다. 부산에 3선 의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호남 대의원들이 많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중앙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조 의원은 1996년 정치권에 입문했다. 15대(1996년·사하갑), 16대(2000년·사하을) 각각 통합민주당과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거푸 고배를 마셨다. 당선자에 40~50%포인트의 큰 표차로 뒤처진 2위였다.
탄핵 역풍이 불었던 17대(2004년) 총선에도 출마했다. 열린우리당 후보였다. 공천에서 탈락한 한나라당 현역 의원이 탈당 뒤 무소속으로 나오면서 보수층이 분열했다. 조 의원은 2.15%포인트(약 2000표)차로 신승했다. 18대(2008년) 총선에서도 친박연대 후보가 9.81%를 득표해 보수표가 갈라졌다. 조 의원은 한나라당 후보를 약 3%포인트 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2012년 총선은 과반(58.19%)으로 승리했다. ‘2번의 행운과 1번의 실력’인 셈이다. 한번의 무난한 당선도, 문재인 대표가 불러일으킨 바람에 힘입은바 크다. “애초에 조경태가 이쪽에 온 이유는, 저쪽이 부산에선 아무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일부의 평가와 무관하게 어쨌든 그는 3선 의원이 됐다.
그에겐 인정해줄 대목이 있다. 지역구 관리 실력이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이 점만큼은 인정한다. 부산행 비행기를 탈 때마다 승객들을 향해 “안녕하세요 조경태입니다. 고향갑니다”고 외친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장 상인의 아들인 그는 상인들과 살갑게 일대일로 오래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지역민들이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지하철’로도 이름을 알렸다. 조 의원은 초선 의원 시절 ‘부산 지하철 1호선 다대포 연장’ 사업을 이뤄냈다. 지반이 약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사업이었다. 부산대에서 토목공학과에서 박사까지 취득한 지식을 활용했다. ‘일 하나는 잘한다’는 인식이 그때 박혔다고 한다.
2. “문재인 그 양반은 변호사나 하면 족한 양반이거든요.”
조경태 민주당 최고위원이 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의원의 대권 재도전 시사 발언을 비판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스스로 ‘원조친노’라고 주장한다. “대학 3학년이던 1988년 총선 때 부산 동구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찾아가 자원봉사를 했다”가 ‘원조친노론’의 서막이다. ‘대선이 있었던 2002년 초, 한 주간지가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을 상대로 ‘대선후보 지지성향’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107명 중 조경태 위원장을 포함해 원외지구당위원장 7명만이 노무현 편에 섰다. 그해 8월엔 국회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노 후보의 후보직 사퇴를 종용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 에피소드도 빠지지 않는다.
현재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반노’다. 이른바 ‘친노’세력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0년 9월 부산시당위원장 선거였다고 알려져 있다. 한달 뒤 있을 전당대회를 앞두고 손학규계와 정세균계가 부산시당 선거에서 맞붙었다. 조 의원은 손학규·정동영계의 지원을, 최인호 전 청와대 부대변인은 정세균·친노무현계의 지원을 받았다. 조 의원은 최 전 부대변인에게 졌다. 원외 인사인데다 입당 며칠도 안된 새내기에게 재선 현역의원이 패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조 의원은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 생각했다.(당시 최인호 후보는 정견 발표에서 “지난 몇년간 시당은 철저하게 사당화되면서 분열됐다. 지방선거 때 자신의 측근 동생을 시의원 후보로 공천하고 당의 시장 후보를 비판하며 김정길 시장후보의 지지율 45%를 ‘미스터리’라고 폄하했다”고 조 의원을 비판했다. 또 “조경태 위원장의 지난 4년간 시당은 분열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고 용호만 매립지 특혜의혹 같은 현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시민단체로부터 ‘선거 때만 있는 정당’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개표 결과 최 후보가 조 의원을 55.6% 대 44.4%로 여유있게 따돌렸다.)
구원은 또 있다. 2012년 4월 총선은 한명숙 대표 지도부가 공천을 주도했다. 그는 재선 의원인데도 1차 공천자 명단에서 배제됐다. ‘현역 의원에 대한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드러난 게 이 정도니 알려지지 않은 일화는 더 많을 것이다.
2012년 총선 때 ‘친노’는 부산입성을 노렸지만 문재인 대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다.(문 대표도 새누리당이 약관의 손수조씨를 후보로 내세우는, 사실상 ‘무시’ 전략 속에 당선됐다) 조 의원은 ‘친노’들의 이런 행보를 우스워했다. 2011년 말께, 조 의원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이사장은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변호사나 하면 족한 양반이죠. 내년 총선 때 안될 겁니다. 내년 총선에 부산에선 아마 한명 될 겁니다.(*본인을 말함) 저는 8년을 지역에서 묵묵히 일하고 고생했잖아요. 적어도 4년은 말없이 지역에서 일해야지, 중앙에서 장관했다 뭐했다고 낙하산으로 내려오고 그런 건 지역에서 안 통합니다.”
‘반문재인’은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지만(조 의원은 경남고등학교를 1986년 졸업, 문 대표는 1971년 졸업했다.), 정치는 까마득한 후배니까. 2011년께 조 의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년 총선에서 문재인씨가 부산에서 되겠어요? 당선된다 해도 초선이고, 저는 부산 3선인데. 표도 저보다 적게 받을 거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에요? 제가 대선에 나가야하는 건가요? 정말 고민이 커요.” 실제 그는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맨 먼저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맨 먼저 탈락했다.
3. ‘조포스’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에겐 보통 정치인에게는 보기 힘든 ‘똘끼’가 있다. 1996년 당시 민주당 후보로 부산 사하갑에 출마했을 때 그는 ‘상반신 누드’ 포스터를 내걸었다. ‘감출 것 없는 정치!, 거짓없는 정치! 젊은 용기로 시작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런 기질은 한때 그에게 ‘리틀 노무현’이라는 칭호를 안겼다. 2008년 이른바 ‘쇠고기 청문회’에 질의자로 나선 그는 정운천 당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몰아붙여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포스(Force)’가 넘친다는 의미로 ‘조포스(조경태 의원)라는 별명이 이때 생겼다.
광야로 나선 ‘조포스’는 어디로 갈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오래전부터 정치 활동을 보면 우리 당의 컬러와 맞는다는 얘기가 많았다”며 구애했다. 국민의당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조 의원을 노리고 있다. 더민주에선 공천도 불투명했던 그에게 광야는, 현재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20대 국회에 살아 돌아온다면 ‘4선 의원’이 될 그는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 탈당 직후 <조선일보>와 통화에서 “문 대표가 (당을) 안 나가니 내가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곳에서 ‘반문재인’ 행보를 이어갈 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밖에는 그런 의원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도 분명하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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