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2주기인 8월 1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김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떤 직업이든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그 직업의 속성에서 오는 독특한 안목과 특징을 갖게 됩니다. 그런 안목과 특징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자는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객관적이고 통찰력이 뛰어납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하고 매사에 부정적입니다.
법조인은 따지는 사람입니다. 논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일은 잘하지 못합니다. 법조인 중에도 검사는 좀 더 특이합니다. 거악을 척결하겠다는 영웅심이 강합니다. 하지만 평생 갑질에 익숙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평생 검사만 하고 검사의 최고 자리인 검찰총장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선주자 경쟁에서 선두권을 달리는 이유는 바로 그가 ‘검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보수층 유권자 가운데 상당수가 윤석열 전 총장에게 문재인 정부 사람들을 다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강력한 검사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윤석열 전 총장은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 ‘왜 윤석열이 대통령을 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단도직입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국민들께서 생각하시는 저에 대해서 기대하시는 게 있다면 저는, 당신이 오랜 세월 법과 원칙 또 상식과 공정을 구현하기 위해서 몸으로 싸우지 않았느냐, 우리가 봤다, 봤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물건을 써보고 그 물건이 좋으면 계속 구매하는 것처럼, 내가 당신 몸으로 싸우는 거 봤으니, 앞으로 우리 국가는 경제도 중요하고 다 필요합니다마는, 외교·안보나 경제 정책이나 교육 정책이나 국가 모든 정책에 있어서 철학과 기본이 헌법과 법치가 무너져서 이런 문제들이 다 생기는 거니까, 당신이 그동안 싸웠던 것처럼 정권교체에 나서고, 이런 무너진 법치와 상식을 바로 세워라, 저는 이런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를 잘 모르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왜 자신이 대선주자로 소환됐는지, 왜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높은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에서 ‘국민의힘 대선주자’로 신분을 바꾸는 데는 여론조사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니스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검찰총장 자리에 앉아 있던 지난해 12월 22일 김대중 칼럼니스트는 ‘윤석열을 주목한다’는 제목의 인상적인 글을 썼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측은 정직 2개월 징계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를 법원에 신청하면서 소송 성격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소송이 맞는다’고 했다. 한마디로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다. 관료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가 극심한 우리나라에서 장관급이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내 기억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저런 용기와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이것은 단지 윤 총장의 용기와 무모함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원칙, 법치에 어긋난 것을 정치로 덮을 수 없다는 원리, 권력으로 불법을 호도하려는 권력 남용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정의감의 문제다. 여기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윤석열이라는 사람의 지도자 자질을 본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정치 권력자들은 정치권 주변에서 술수 요령을 배우고 몇 차례 선거를 거처 국회에 진출하고 경쟁자와 이전투구를 벌인 끝에 지도자 반열에 오르곤 했다. 윤석열은 아니다.”
“그의 인기는 그의 용기·철학·신념·정의감에 감동받은 국민들의 자발적 평가인 셈이다. 그리고 문 정권의 좌파 독재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윤석열 전 총장의 대선 출마 선언 2주일 뒤인 7월 13일에는 다시 ‘문재인 5년을 지울 청소부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지금은 경세가(經世家)를 필요로하는 시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난맥을 바로잡을 ‘청소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문재인’을 지우고 법치를 바로 세워 나라를 전통의 자유민주주의로 되돌려 놓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쳐낼 ‘싸움꾼’을 원한다.”
“우선순위는 우리 정치사에서 문재인 5년을 청산하고 지우는 것이다. 좌파 적폐를 가려내고 보수·우파의 지고한 가치인 법치·공정·질서·안보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러면 누가, 어떤 후보가 이런 ‘문(文) 적폐 청산’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사회에서 이런 작업은 혁명적으로 처리될 수 없다. 이런 작업은 법치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즉 사법적(司法的) 접근으로 문 적폐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금 야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대통령 예비 후보의 선두 주자들은 사정(司正) 기관 출신이다. 사물을 법(法)으로, 사리(事理)로 처리하는 데 일생을 바친 공직자다. 야당의 대선 주자들 중에도 법을 다뤄온 사람이 여럿 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의 두 번째 칼럼에 태극기 부대 성향의 사람들은 큰 감동을 한 것 같습니다. 칼럼을 쓴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카카오톡 대화방에 이 칼럼을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 줄기차게 “주사파 정권 몰아내자”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칼럼니스트나 태극기 부대의 기대와 달리 윤석열 전 총장의 여론조사 지지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전국지표조사가 19일 발표한 최근 6개월 치 차기 대통령 적합도를 보면 윤석열 전 총장은 3~4월에는 이재명 경기지사와 선두 각축을 벌였으나 이제는 2위 주자로 굳어지는 흐름입니다.
한국갤럽이 20일 발표한 지난 3월과 최근 대선주자별 호감도 비호감도 조사를 보면 이런 추세를 좀 더 명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3월에는 호감 40%, 비호감 47%였습니다. 그러나 8월에는 호감 29%, 비호감 58%로 크게 나빠졌습니다.
이 조사는 아르디디(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휴대전화 85%, 집 전화 15%)했습니다. 문항은 대선주자 각각에 대해 ‘호감이 간다’, ‘호감이 가지 않는다’를 물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내용은 더 심각합니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3월에 호감 85%, 비호감 10%였는데, 8월에는 호감 66%, 비호감 24%로 약해졌습니다. 무당층은 3월에 호감 33%, 비호감 39%였는데 8월에는 호감 17%, 비호감 53%로 크게 악화했습니다. 야당과 무당층 양쪽에서 모두 윤석열 전 총장을 외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의 양자대결에서도 점차 밀리는 추세입니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한 자릿수 미만으로 주저앉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급속히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야당의 다른 경쟁자들이 너무 허약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국 대안부재로 겨우 버티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윤석열 전 총장의 이런 한계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월 20일 치 <조선일보> 최승현 논설위원의 이준석 대표 인터뷰에 이런 문답이 있습니다.
-윤 전 총장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 아닌가.
“당내 인사 중에선 사석에서 윤 전 총장과 가장 많이 만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수차례 회동에서 대화가 안 되는 부분을 느낀 게 전혀 없다. 윤 전 총장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이 밀 수 있는 가장 상징성 있는 후보라고 생각한다. 문 정권의 탄압에 맞서는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심정적 응원을 하면서 깊은 유대가 형성돼 있다.
다만 앞으로는 얼마나 확장성 있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전통적 지지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 중도층을 흡수하기 위해 광폭의 스펙트럼을 보여줬으면 한다. 젠더 이슈 등 공정도 여러 갈래가 있기 때문에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의 진단이 옳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정치적 존재 가치는 ‘반문재인’에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반감을 가졌지만 국민의힘에 기대를 걸 수 없었던 유권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반문재인 깃발 아래 모여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반문재인 깃발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전임자에 대한 반대의 깃발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습니다.
이준석 대표의 기대처럼 윤석열 전 총장이 ‘확장성 있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지지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 중도층을 흡수하기 위해 광폭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젠더 이슈 등에 대해 세밀한 접근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애초부터 갖지 못한 덕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민의힘 대선주자 경선에서 윤석열 전 총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철수 대표가 아니었다면 오세훈 시장이 야권 단일후보를 거쳐 서울시장에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쟁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경쟁력이 약한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 당내 대선주자들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의 경선을 통해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등 당내주자들이 윤석열 전 총장의 높은 지지도를 고스란히 흡수해 내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면, 이재명 지사든, 이낙연 전 대표든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예측 불가의 승부를 펼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승민 캠프의 이기인 대변인이 8월 20일 이런 논평을 냈습니다.
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가
윤석열 후보가 8월 초 여름 휴가 후 거의 안 보입니다. 1일 1구설 하시더니 언론도 기피하고 토론도 무산시키고 잠수타고 계십니다. 심지어 비전 발표회 불참을 고려한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다시 전언 정치, 사진 정치로 되돌아간 겁니까.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국민과 소통을 하면서 본인이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유권자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에 대해 본인의 철학과 정책 방향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을 통한 국민과의 소통도 무섭고, 토론회도 무섭고ᆢ 이러실 거면 대통령 선거에 왜 나오셨습니까? 질문을 피하고, 기자회견을 피하는 대통령, 지금까지도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그만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윤석열 전 총장은 8월 25일 비전발표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22일에는 자영업 비대위와 간담회도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정직해야 합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합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직업적 정체성은 ‘검찰총장’입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반문재인’입니다.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이번에는 ‘반문재인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8월 25일 윤석열 전 총장의 비전발표회부터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