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공개된 1980년 3월13일 미 국무부 문서. 미 국무부 제공
“나는 군에 대한 영향력이 전혀 없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980년 1월7일, 주영복 국방장관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이렇게 실토했다. 그는 그해 6월로 예정된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가 열리지 않을 경우, 자신뿐 아니라 민간 정부의 영향력이 약화할 것이라며 “당신이 나를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반면 이튿날 최규하 대통령은 방한한 레스터 울프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등에게 “최근 군부의 갈등(12·12)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지만 이제는 마무리 됐으며 군 지휘체계가 안정됐다”고 했다. 변화가 “단계적으로, 헌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이뤄질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미국 쪽이 12·12를 박정희 암살의 ‘첫 여진(aftershock)’으로 보고, “추가적 여진이 한국의 안정에 가장 심각할 수 있다”고 판단하던 시점이었다.
미 국무부가 2일 공개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외교문서 14건에는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뒤 주한미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담겼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인 5월17일, 주한 미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서울에서의 탄압’이라는 전문을 보면, 한국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짐작건대 전두환이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결정 과정을 전하면서는 “무기력한 대통령(helpless)과 내각이 그 결정을 인가했다”고 적었다. 미 대사관 쪽은 사전에 비상계엄 확대와 관련한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며 미국 정부를 “어둠 속에 뒀다”고 거듭 불만을 표시했다.
이 전문은 1990년대 중반 미 국무부가 광주시에 기증한 2400건의 5·18 관련 문서에 포함됐으나 당시에는 전두환·최규하 관련 부분은 가려진 채 공개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는 “새로 공개된 내용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서 고립된 상황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개된 문서에서는 미국 정부가 실세로 등극한 전두환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놓고 고심하는 정황도 확인된다. 3월13일 미 국무부가 작성해 주한미대사관 쪽에 전한 문서를 보면 리처드 홀부르크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3월5일 글라이스턴 대사와 전두환의 면담을 두고 “(면담)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며 “전두환이 (이번 만남을) 올리브 가지라고 해석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군부 실세’로서 전두환을 인정하고 향후 글라이스턴과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 대한 접근권을 확약했다고 받아들였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두환을 이렇게 ‘대우’해주는 것이 적절해보이지 않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앞서 시민단체와 학계는 5·18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 80건 공개를 외교부를 통해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57건을 공개했으나 5·18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민감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5·18 진상조사위 관계자는 “나머지 23건은 미국 정부가 더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면 공개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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