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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김준형 “‘가스라이팅’ 비유는 한미동맹 중독에서 깨어나잔 뜻”

등록 2021-03-31 14:36수정 2021-03-31 17:36

국립외교원장 전화 인터뷰
“동맹 해체가 아니라 할 말을 해야 동맹 강화”
자국 이익 극대화가 ‘외교’의 목표…“미국도 우리의 변수일 뿐”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해당 저서는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으며, 국제정치와 한-미 관계를 평생 전공한 학자로서 개인적 소신과 분석을 담은 글입니다.”

30일 밤 9시15분. 외교부 대변인실이 출입기자들에게 뜻하지 않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외교부 차관급 공무원인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새로 펴낸 <새로 읽은 한-미 관계사-동맹이라는 역설>(창비)에서 한-미 동맹에 대해 내린 다음과 같은 평가 때문이었다.

70년의 긴 시간 동안 한-미 동맹은 신화가 되었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되어 왔다. 이는 우리가 처한 분단구조와 열악한 대외 환경 아래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 있다.

예상대로 보수 언론들은 30~31일 정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차관급 공무원인 국립외교원장이 밝힌 ‘동맹 인식’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취지의 기사를 쏟아냈다.

김준형 원장은 31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책은 “외교부 정책 라인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국립외교원에 몸 담은 한 사람의 학자로서 고민을 담은 것이다. 5년 전부터 계획한 책이었는데,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 쓰게 됐다”고 운을 뗐다. “가스라이팅이란 용어 자체는 제가 먼저 사용한 것은 아니다. 김근식 경남대학교 교수(정치학)가 (2020년 6월) 문재인 정부를 향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데 잘못된 비유가 아닌가 생각했다. 가스라이팅이 성립하려면 사이가 좋아야 하고, 압도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 압도적 지배력으로 상대방의 합리적 판단력과 현실감을 잃게 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다. 남북 관계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에서 김 원장이 눈을 돌리게 된 것은 한-미 관계였다. 누군가 한국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면, 그 주인공은 북이 아니라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자, 압도적 강자로 군림해 온 미국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북의 생떼가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오히려 한-미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 용어가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한국이 미국에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찌됐든 한-미 동맹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원장은 이 책에서 “동맹을 ‘해체’하자는 과격한 주장이 아니라 동맹의 ‘중독’에서 깨어나 한-미 동맹을 할 말은 하는 동맹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윤병세 외교장관이 말한 것처럼 한국이 미-중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는다고 너무 낙관할 것도 아니지만,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가 책에서 한국이 할 말을 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시킨 예로 꼽는 것은 1998~2000년 ‘페리 프로세스’의 경험이다.

북한이 1998년 8월31일 첫 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술을 활용한 대포동 1호를 발사하자 동아시아 정세는 단숨에 냉각됐다. 일본 영공을 통과해 서태평양에 떨어진 발사체에 일본은 분노했다. 이는 미국이 묵과하기 힘든 안보 위협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은 전면적인 재검토와 수정에 내몰리게 된다. 1998년 11월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했다. 그는 1994년 봄 1차 북핵 위기 때 북한에 군사적 조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강경파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북폭 계획은 ‘특정 지역에 한정한 정밀공격’이라 해도 개전 초기 3개월 만에 미군 사상자 5만 명, 한국군 49만 명, 민간인 100만 명 이상의 피해가 날 것이라는 미 국방부의 예측 탓에 실행되지 못했다.

햇볕정책의 설계자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 등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가 ‘강경파’ 페리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임동원 전 장관은 “북한의 핵개발이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동기는 한반도 냉전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응하는 대증요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설득했다. 결국 페리는 1999년 10월 △단기적으로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계획을 전면 중단토록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킨다는 내용을 뼈대로 보고서를 완성했다. 페리는 그에 앞선 3월 중간 보고서 내용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설명하며 “(내 의견은) 임동원 수석이 제시한 전략 구상을 도용하고 표절해 미국식 표현으로 재구성한 데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반도 운전자론’이란 새로운 용어가 탄생했다.

김 원장은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 없다. 미국도 우리의 변수다. 우리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라 봐야 한다. 미국을 지나치게 두렵거나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다 보니,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국제적인 집단 리더십을 구축하려 하면서 리더십 공백을 메우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원장의 새 책 <새로 읽은 한-미 관계사-동맹이라는 역설>은 이런 비판적 관점에 서서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부터 2019년 하노이 결렬까지 한국과 미국이 맺어온 140년사를 돌아보는 책이다. 비슷한 견지에서 미-일 동맹을 비판적으로 회고한 책으로는 마고사키 우케루 전 외무성 국제정보국장의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2013·메디치)가 있다. 마고사키 전 국장 역시 미국이 자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일본 정치를 왜곡시켰던 여러 사례를 소개하며, 일본이 자주적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쏟아낸다. 이 책을 번역한 이는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이고,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이 해제를 썼다. 문 이사장은 김 원장의 책에도 “보기 드문 역작,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는 평을 남겼다. 문 이사장, 김 원장, 양 교수 모두 한국의 ‘자주외교’를 중시하는 이른바 ‘연정(연세대 정외과)라인’임을 생각해 본다면, 마고사키에서 문정인을 거쳐 김준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적 흐름이 ‘우연’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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