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토니 블링컨(왼쪽)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9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1박2일 미중 고위급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앵커리지/로이터 연합뉴스
관심을 모았던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첫 국외 일정이었던 한-일 순방과 미-중 고위급 대화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 외교의 사령탑인 블링컨 장관은 앞으로 4년 동안 전개될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방향’을 비교적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앞으로 한-일 등 주요 동맹들과 함께 ‘인권’ 등 자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중국을 견제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중 대립은 향후 세계 질서의 방향을 결정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갈등입니다. 지난 18~19일 알래스카에서 진행된 격한 대립을 보고 있자니, 바야흐로 ‘미-중 신냉전’을 더는 피해갈 수 없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겐 그것 말고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난제가 있습니다. 북핵 문제입니다. 블링컨 장관의 한국 방문이 끝난 이 시점에서 자문해 봅시다. 현재 대북 정책을 재검토 중인 바이든 행정부는 앞으로 의미 있는 북-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난주 이뤄진 북-미 간 1차 탐색전의 경과를 살펴 보면, 어느 정도 합리적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해 말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뒤에도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북한은 올해 초 열린 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향후 대미 정책에 대해 언급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9일 <노동신문> 보도를 통해 공개된 노동당 제8차 대회 사업총화(결산) 보고에서 “대외 정치활동을 우리 혁명 발전의 기본 장애물,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지향시켜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북한이 미국과 무조건 적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2월28일 오전 메트로폴 호텔에서 이틀째 만나 단독 정상회담을 하기 앞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하노이/AFP 연합뉴스
북한은 지난 2019년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핵의 상징인 ‘영변’을 폐기하는 대가로 경제 개발의 가장 큰 장애물인 유엔 제재의 핵심 부분을 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전은 처절한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자 북한은 한달 반 뒤인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를 통해 새 대외 전략을 제시합니다. 김 위원장은 당시 회의 이틀째인 4월12일 시정연설에서 새 경제 개발 노선을 ‘자력 갱생’으로 제시하며, 미국에는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근본적 요구를 쏟아냅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초 열린 제8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도 “새로운 조-미 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데 있다”며 “앞으로도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내려 놓고 선의를 가지고 대하면 이에 호응하겠지만, 강경한 자세를 보이면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언급을 끝으로 북한은 한동안 미국과 관련한 언급을 삼갑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18일 오후 청와대에서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왼쪽 두번째)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맨왼쪽) 접견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두달 가까이 이어진 북한의 침묵이 깨진 것은 블링컨 국무장관의 방한을 앞두고 나온 외신 한 토막 때문이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미 정부 고위 관리는 지난 13일 <로이터> 통신에 “2월 중순부터 시작해 뉴욕을 포함해 여러 채널을 통해” 북한 정권에 접촉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평양으로부터 어떤 반응도 받지 못했다”고 밝힙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 재검토 과정에서 뉴욕에 있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 쪽과 접촉해 ‘비핵화’와 관련된 정확한 의중을 탐색하려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보도였습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보도가 사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자 16일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담화를 내놓습니다.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북의 거듭된 경고에도 대북 적대시 정책의 핵심인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지난 8일부터 강행했다고 비난하며, 제일 마지막 부분에 미국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깁니다. 북한이 미국의 ‘새 행정부’, 즉 바이든 행정부를 직접 언급하며 비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대양 건너에서 우리 땅에 화약내를 풍기고 싶어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의 새 행정부에도 한마디 충고한다.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싶은 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없이 잠 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을 보채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한 미국을 견제하면서, 미국이 지금 같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군사적 도발’을 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2017년처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발사하는 전략 도발에 나서면, 미국이 편하게 잠을 잘 수 없게 됩니다.
2017년 11월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이 발사되는 장면.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이튿날인 17일에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나섰습니다. 최 제1부상은 다시 한번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조-미 접촉이나 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북의 기존 입장을 다시 밝힌 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미국의 접촉시도를 무시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와 함께 북과 진지하게 마주 앉길 원한다면 ‘입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아래와 같은 내용입니다.
“미 군부는 은근히 군사적 위협을 계속 가하고 숱한 정찰자산들을 동원하여 우리에 대한 정탐행위를 감행하고 있으며 내외의 한결같은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겨냥한 침략적인 합동군사연습을 뻐젓이 벌려놓았다. 한사코 우리를 헐뜯고 걸고 드는 버릇 또한 고치지 못한 것 같다. 미국은 우리 국가의 방역조치를 놓고도 그 무슨 ‘인도주의지원’을 저해한다는 매우 몰상식한 궤변을 뱉아 놓았다. 일본을 행각한 미 국무장관이 여러 압박수단 혹은 완고한 수단 등이 모두 재검토중 이라고 떠들며 우리를 심히 자극하였는데 이제 남조선에 와서는 또 무슨 세상이 놀랄만한 몰상식한 궤변을 늘어놓겠는지 궁금해진다. 우리와 한번이라도 마주앉을 것을 고대한다면 몹쓸 버릇부터 고치고 시작부터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최선희 제1부상이 궁금해 했던 블링컨 장관의 “세상이 놀랄만한 궤변”은 17일 오후 6시 반 시작된 한-미 외교장관 회담의 머리발언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블링컨 장관은 중국의 인권 상황을 두루 언급한 데 이어 “북한의 권위주의 정권은 자국민에 대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학대를 자행하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또 18일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의를 마친 뒤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도 2018년 6월12일 북-미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란 용어 대신 ‘북한 비핵화’란 표현을 고수했고, 다시 한번 북한 인권을 언급하며 “북 주민들이 압제적인 정권 아래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핵 문제를 푸는데 한·일 등 동맹국뿐 아니라 “중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블링컨 장관의 이런 발언을 통해 향후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접근법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이든 행정부는 북핵 문제에 초점을 맞춘 실용적 접근을 한 전임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북한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건 근본적 협상을 진행할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북-미 양자 대화로 문제를 풀려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한·일 등 동맹국은 물론 중국 역할을 강조하는 다자적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북한 비핵화’ 용어를 고수한 것으로 볼 때, 한국 정부의 희망과 달리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북-미 대화의 시작점으로 삼지 않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외교의 본질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며 합리적 타협안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접근이 너무 이념적이고 근본주의적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 생각한다면, 외교 입지는 줄어들고, 격한 대립이 발생할 가능성은 커집니다.
북한은 이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접근법에 호응할까요?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김여정 부부장이 경고한대로 북한이 도발하면서 미국이 “멋 없이 잠 설칠”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최대의 압박’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미 관계는 2017년 이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막는 게 한국 정부의 역할이겠지만, 앞으로 전개될 한반도 정세의 방향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