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미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을 방문 중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북한에 내년 1월 노동당 8차 대회까지의 시간을 북-미 협상 재개를 위해 써줄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또 북-미 협상이 성공하려면 실무 협상단이 권한을 가지고 지도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합의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건 부장관은 10일 오후 아산정책연구원 초청 강연 ‘미국과 한반도의 미래’에서 “싱가포르 정상합의의 잠재력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북-미 정상들에게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모두가 이 문제의 긴급성과 우선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8년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 공동선언에서 북-미 간 새로운 관계 수립, 한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한국전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
비건 부장관은 북한과 협상 과정을 돌이키며 “안타깝게도 북한의 카운트파트는 지난 2년간 너무 많은 기회를 낭비했다”며 “북한은 대화의 기회를 움켜쥐는 대신 협상 장애물을 찾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는 안 된다. 외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노딜’로 끝난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교훈을 꼽았다. 하나는 실무협상의 중요성이었다. 그는 “정상회담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실무협상이 중요하다”며 자신과 대화상대였던 김혁철 북한 대미특별대표는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비건 부장관은 “북한 사람들이 다른 체제, 다른 제약, 선택에 있어서 다른 한계가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봐야 한다”는 점을 두 번째 교훈으로 언급했다.
쉽사리 북한을 악마화하는 인식에 선을 그은 것으로, 북쪽과 협상 과정에서 이들의 “진정성”을 봤다고 했다.
비건 부장관은 양쪽이 합의 사항을 동시적·병행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무엇을 하기 전에 북한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고 북한도 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반드시 실행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 로드맵의 궁극적 지향점에도 합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는 새로 들어설 조 바이든의 대북 협상팀에게 “전쟁은 끝났다. 분쟁의 시간은 끝났고 평화의 시간이 도래했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미국과 한국, 북한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드디어 한국인들이 누려 마땅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한편 비건 부장관은 이날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한-미 동맹의 진화 필요성에 할애했다. 그는 지난 70년간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동맹을 확장해야 한다”며 “한-미 동맹의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양국 정부 간 솔직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답하며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의 한-미 동맹의 역할”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비건 부장관은 방위비 분담금과 전시작전권 전환 및 연합훈련을 둘러싸고 양국이 논쟁을 벌여온 점을 언급하며 “많은 부분이 지도자들이 동맹의 미래지향적인 목적에 목소리를 부여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이번 방한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 지점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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