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 전화를 걸고 있다. 청와대 제공
‘린치핀’(linchpin)이란 말을 아시나요?
한-미 관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께선 미국이 한-미 동맹을 상징하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해 온 ‘린치핀’이란 말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자동차나 마차 등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고정하는 핀”이란 의미인데, 한국 언론에선 주로 ‘핵심축’이란 뜻으로 번역합니다.
미국이 한국에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은 2010년 6월26일(현지시각)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무렵 나온 빅터 차 당시 조지타운대 교수(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의 <조선일보> 칼럼을 보면 “린치핀이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미국이 미-일 동맹을 묘사하는 데만 써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 관계를 설명하는 데 린치핀이라는 용어를 쓴 직후 일본 관리들이 재빨리 사전을 찾았다는 후문입니다. 린치핀이 단수로만 쓰이는 것인지, 그래서 일본이 더 이상 린치핀이 아니라는 뜻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런 우려를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역사적 대승’을 거둔 일본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뒤 미-일 동맹의 중요 현안이었던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헤노코 문제’란 한국에서도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미군기지 문제를 의미합니다. 민주당 정권의 첫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미군기지로 인해 수십년 동안 큰 피해를 감수하며 살아온 오키나와 시민들을 위해 선거 유세기간 동안 “후텐마 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보수 세력들은 미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공동체’ 등의 개념을 제창했던 민주당 정권이 미-일 동맹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이런 우려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그동안 미-일 동맹에만 사용해 온 린치핀이란 용어를 한-미 동맹에 사용했으니,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 미-일 동맹이 크게 악화됐다”는 험악한 비판과 공격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이와 대조적으로 한-미 동맹을 금지옥엽으로 생각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애초 2012년 4월17일로 예정돼 있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1일로 늦추기로 합의하며 미국에 ‘몰두’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우려는 곧 사라집니다. 2012년 12월16일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며칠 뒤면 일본 총리로 취임하게 될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미-일 동맹에 ‘코너스톤’(초석)이라는 새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은 사흘 뒤 이뤄진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에겐 이전과 같은 ‘린치핀’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의 두 개의 동맹 중 미-일 동맹을 지칭할 땐 ‘코너스톤’, 한-미 동맹을 부를 땐 ‘린치핀’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초석이 있어야 그 위에 핵심축이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미-일 동맹을 인도-태평양의 제1동맹, 한-미 동맹을 제2동맹이라 평가하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개발한 두 용어는 그대로 트럼프 행정부에도 계승돼 일종의 ‘관용어구’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지난 3일 미국 대선이 치러진 뒤 잠시 혼란기를 거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됐습니다. 바이든 당선자는 승리를 선언한 뒤 9일 이웃나라인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와 첫 전화 통화를 한 뒤, 10일엔 유럽의 동맹국들과 짧은 축하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어 11일(한국 시간 12일 오전)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정상들과 통화했습니다. 통화 이후 바이든 당선자 쪽은 관례에 따라 누리집에 이 통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공개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기밀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언제든 두어번의 클릭으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https://buildbackbetter.com/press-releases/readout-of-the-president-elects-foreign-leader-calls/)
이 자료를 살펴 볼까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가 공개한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정상 통화 내용 공개 자료. 바이든 당선자 인수위 누리집 갈무리
한국에 대해
The President-elect thanked President Moon for his congratulations, expressing his desire to strengthen the U.S.-ROK alliance as the linchpin of security and prosperity in the Indo-Pacific region.
당선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축하인사에 감사한 뒤,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 린치핀(핵심축)인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밝혔다.
일본에 대해
They also spoke about their shared commitment to tackle climate change, strengthen democracy around the world, and reinforce the U.S.-Japan alliance as the cornerstone of a prosperous and secure Indo-Pacific region.
그들(바이든 당선자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은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세계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며, 번영하고 안정된 인도-태평양 지역의 코너스톤(초석)으로서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싶다는 공통된 서약에 대해 얘기했다.
이 자료가 공개된 뒤, 한국에선 이해하기 힘든 ‘소동’이 벌어집니다. 바이든 당선자가 ‘린치핀이란 용어를 통해 한국이 반중전선에 참여하도록 압박했다’는 취지의 속보가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기자들에게 보낸 알림에서 “오늘 통화에서 바이든 당선인은 ‘인도 태평양의 안보와 번영’을 언급했습니다. ‘인도 태평양’은 해당 지역을 지리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인도태평양 전략’과는 무관합니다. 그런 의미로 언급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반중전선’을 강조했다는 일부 보도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바이든 당선인은 전혀 중국과 관련한 발언을 하지 않았고, 그런 뉘앙스의 언급도 없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조 바이든 당선인의 린치핀(핵심축) 발언을 ‘대중압박’ 메시지라 해석한 <중앙일보> 14일 1면 기사
그렇지만, 강 대변인의 알림은 한국 보수 언론 앞에서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조선일보>는 14일치 1면에서 바이든 당선인이 “한국은 안보 린치핀이라는 오바마 행정부 때 단어를 다시 꺼냈다”며 바이든 당선자가 “한국, 일본과 동맹을 강화해 ‘한미일 협력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중국 견제에 나설 것”이라는 외교가의 반응을 소개했습니다. <중앙일보> 역시 1면에서 바이든 당선자이 문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인도-태평양의 린치핀’이 등장했다며 이를 ‘대중압박 메시지’라 해석했습니다. <동아일보>도 1면에서 바이든 당선자가 “한미동맹이 인도태평양 핵심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강조하며, 이를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미국이 “중국 견제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전하며 한국의 동참을 촉구한 것”이라 적었습니다.
2017년 6월30일 트럼프 행정부 백악관이 공개한 한-미 정상회담 설명자료. 한-미 동맹을 한반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리고 세계의 안전, 안정, 번영을 위한 ’핵심축’(린치핀)이라 표현하고 있다. 백악관 누리집 갈무리
이른바 ’조·중·동’의 이런 지적이 공감을 얻으려면,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충족돼야 합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사용한 린치핀이라는 용어가 트럼프 행정부 때는 사라졌다가 4년 만인 지난 11일 통화 때 극적으로 부활한 것이라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에 접속해 린치핀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17개의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한-미 정상회담마다 미국은 한-미 동맹의 의미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린치핀’이란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 내용을 설명하는 2017년 6월30일 자료에 한-미 동맹이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리고 점점 더 전 세계의 안전·안정·번영의 핵심축으로 기능해 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불과 서너달 전인 7월27일 한-미의 ‘한국과 안보 협력’이라는 제목의 팩트 시트에도 한-미 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전과 안정의 핵심축”으로 기능해 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국과 안보협력에 대한 미 백악관의 설명 자료. 백악관 누리집 갈무리
그래서 결론은 뭐냐고요? 문재인 정부의 대미 정책에 불안감을 느끼는 보수 언론의 우려는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 조금씩 다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동맹 간 협조에 별 관심이 없었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한-미-일 3각 동맹을 정비해 대중국 견제에 나설 것이란 전문가들의 예측에도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바이든 당선자의 통화는 그야말로 서로 축하의 인사를 주고 받은 상견례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린치핀이란 표현을 확대해석해, ‘문재인 정부가 중국 눈치를 보는 바람에 한-미 동맹에 소홀하고 있다. 바이든 당선자가 앞으로 한국을 중국 견제에 활용하기 위해 린치핀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전화는 전화일 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오버’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상대의 한마디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신중치 못한 보도가 오히려 국익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