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9월24일 문재인 대통령과 한-일 전화회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총리관저 제공
한-일 관계 개선의 ‘변곡점’으로 꼽혔던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연내 방한’이 사실상 무산됐다. 조속한 관계 개선을 통해 양국 현안을 적절히 관리하고 일본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시키려던 정부 계획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교도통신>은 12일 복수의 한-일 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9월 말 양국 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받아들일 만한 조처를 (한국이) 강구하지 않는 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올해 한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의에 출석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일본이 받아들일 만한 조처’란 “(한국 법원에)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되지 않도록 (한국 정부가) 보증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일 외교당국은 이 보도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재웅 외교부 부대변인은 13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연내 개최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유관국들과 협의 중”이라고만 말했고,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도 상세 언급을 삼갔다. 이 보도의 진위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에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다.
스가 총리는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취임 뒤 첫 전화회담을 끝낸 직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양국 관계를 방치해선 안 된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우리의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한국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해가겠다”고 말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려면 한국 정부가 먼저 ‘성의 있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일본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앞서 외무성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일본 언론에 ‘현금화를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확약 없이 “스가 총리가 3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행정부가 사법 절차에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일본 요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일본이 이처럼 한국이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내건 것은 스가 총리 방한 이후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가 이뤄질 경우 ‘정치적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가 정권은 지난달 16일 60% 넘는 높은 지지율과 함께 출범했지만, 이달 초 일본학술회의가 추천한 인사 105명 중 6명을 정부가 임의로 배제했다는 ‘일본판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지지율이 7~8%포인트나 빠졌다.
반면 지난해 일본과 격렬한 ‘외교전’을 벌였던 우리 정부는 올해 들어 ‘확전’ 대신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스가 총리 등장 이후에도 일본의 강경 기조가 이어지면서, 정부로선 미 대선 이후의 정세 변화 속에서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길윤형 성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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