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로 알려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섬 하시마. 1940년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가 100명 이상이 숨진 곳이다. 사진 안관옥 기자
최근 일본의 ‘역사 왜곡’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군함도’(하시마)에 대해 정부가 ‘지정 취소’를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지정 취소. 가능한 일일까요?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정 취소 카드를 가장 먼저 꺼내든 이는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1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대상 간담회 업무보고에서 유네스코에 “지정 취소를 요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러자 문체부가 22일 보도해명자료를 내놓습니다. “정부는 (군함도에 대한 역사 왜곡 정보를 전시하고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와 관련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취소 요구를 공식 발표한 바 없다”며 “외교부 등과 협의해 일본이 약속을 이행하도록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박 장관의 발언에서 두 걸음쯤 물러선 듯한 내용입니다.
문체부가 한발 앞으로 치고 나가자 외교부도 입장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김인철 대변인은 23일 “전날 유네스코 사무총장 앞 서한을 통해 등재 취소 가능성 검토를 포함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에 충실한 후속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이 채택될 수 있도록 협조와 지지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등재 취소’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강조점은 ‘일본에 충실한 후속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 채택’을 추진하겠다는 뒷부분입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같은 서한을 문체부·외교부가 각각 내는 등 “부처 간 세 싸움을 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미쓰비시 하시마 탄광 강제노역 현장을 찾은 관광객들. 사진 안관옥 기자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부터입니다. 이후 지금까지 48년 동안 지정 취소가 이뤄진 예는 두 건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2007년 오만의 ‘오릭스 보호구역’, 두번째는 독일 드레스덴의 ‘엘베강 협곡’이었습니다. 두 사례 모두 해당국 정부가 ‘유산 보호’보다 ‘개발’을 원했습니다. 오만 정부는 이 지역에 유전을 개발하려 했고, 독일은 협곡에 경관을 훼손하는 교량을 건설했습니다. 실제, ‘세계유산조약이행을 위한 작업지침’을 보면, 지정 취소는 “등록이 결정된 자산이 그 특징이 상실될 정도로 망가진 경우”나 “유네스코가 요구한 (유산의 물리적 보호와 관련된) 개선 조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 한정됩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도 이번처럼 ‘역사 왜곡’을 사유로 제3국 정부가 지정 취소를 요구한 전례는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 지정 취소를 위해선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 ‘산업유산 정보센터’ 내부에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로 악명이 높은 하시마(군함도)의 모습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 제공
그렇다면, 정부는 일본의 파렴치한 역사 왜곡에 손 놓고 있어야 하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등 메이지 시기 일본의 산업 발전을 보여주는 23개 시설을 등재하며 군함도 등 일부 산업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인포메이션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15일 일반 공개가 시작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의 내용을 보면, 한반도 출신자가 군함도 등에서 차별적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는 증언이 소개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15일 일반에 공개된 도쿄 신주쿠 산업유산정보센터 누리집 갈무리. 이 센터는 군함도에서 일했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는 증언을 소개하는 등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약속 위반’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 대표의 2015년 7월 발언 내용을 그대로 전시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꼼수가 ‘자기 의사에 반해 강제로 노역 당한 조선인의 사연’ 등 유산에 대한 모든 역사(full history of each site)를 전시하라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내용을 이행한 것이라 볼 순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센터의 관장이 아베 신조 총리와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을 공유하는 오랜 친구 가토 고코(아베 총리의 측근인 가토 가쓰노부의 처형)라는 점입니다.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베 총리의 고집이 이 문제를 계속 꼬이게 만들고 있는 주 원인인 셈입니다.
다행히 유네스코에서도 “한국의 우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에 전달했다”는 취지의 회신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외교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한 ‘지정 취소’ 대신 약속을 미 이행하고 있는 일본이 잘못을 시정할 수 있도록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내 여론을 모아가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목표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이 섬을 둘러싼 ‘모든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전시물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일본정부의 군함도 강제동원 사실 인정과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한-일은 2017년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일본은 2016~2017년 유네스코 분담금(2020년 현재 중국에 이어 2위 분담국)의 ‘지급 유예’는 물론 ‘탈퇴 위협’까지 하며 이 등재를 끝내 저지했습니다. 당시 이 사업을 추진했던 한혜인 국제연대위원회 사무단 총괄팀장은 “미국이 2017년 탈퇴를 선언한 마당에 일본까지 이런 협박을 해오니 유네스코는 당연히 조직의 와해 가능성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정부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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